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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생 60여년, 한상일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한상일(1955~)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는 국악에 입문한 지 올해로 60여 년을 맞는다. 때 맞춰 지난 1월 25일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에서 선정하는 제15회 문화대상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형화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해왔으니 만큼 수상은 당연해 보인다. 한 감독을 3월 30일 오전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창덕궁의 건너편에 있었던 옛 국악학교 터와 창극 연출가 허규(1934~2000) 선생이 운영하던 북촌창우극장에 대한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한 감독이 배우고 공연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밴 공간들이었다. 한감독의 음악 인생은 아버지 한범수(1911~1984) 선생에게서 비롯됐다. 해금과 대금 연주에서 ‘한범수류’를 만든 장인이셨다. Q. ‘한범수류’는 어떤 특색을 가졌나요? A. "진양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가락을 짰고, 중모리에는 바리에이션을 넣었어요. 대개 산조는 판소리 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선친은 판소리 어법을 배제한 채 기악을 판소리의 아류가 아닌 개성을 갖춘 독자적 영역으로 만들었죠. 독립곡 형태의 양식을 갖는 잘 짜인 산조였어요.” 한 감독은 출생지인 충남 부여에서 옮겨와 서울서 살던 9살 무렵부터 선친에게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적(소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빈 병 불 듯이’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웠다. 맨 처음 부른 곡은 아리랑이었다. 유일하게 알던 곡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들어보시더니 ‘재능이 있다’ 느끼셨는지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본격적인 교육은 배문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전문 과정이니 만큼 선친은 곡의 음악적 성격과 그에 합당한 표현법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신 후에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론 먼저 기능 나중’식 교육법이었다. 산조곡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12주기와 24주기 식 기승전결법을 배웠다. 기자는 연주가 스토리를 가진 채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도제식 교육으로 소금과 대금을 사사한 후에 서울국악예고와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해 피리를 전공했다. 왼손잡이여서 대금 연주는 접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대금 잡는 방향이 거꾸로여서 합주에 지장을 준 때문이었다. 이후 한상일은 작곡의 길에 들어서 중앙대 대학원 작곡 과정 석사를 거쳐 1987년 국립창극단 기악부 초대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창극에 전주곡을 비롯, 간주곡과 엔딩곡 등을 작곡해 기악 연주를 가세한다. 소리꾼과 고수 2인의 무대인 판소리와 달리 창극에는 출연자가 많이 등장하고 다양한 연기가 표출되는 만큼 기악 연주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 획기적 시도로 창극의 사이즈를 대형화시키는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필요성에 몰입한다.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처럼 노래와 춤에 걸맞은 관현악단의 기악 연주가 더해짐으로써 창극 공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기왕에는 연주자들이 재량껏 즉흥연주로 채우던 부분을 악보에 근거한 연주로 체계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1월 1일 마침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이 공로로 그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과 200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에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동국대학교에서 20여 년 간 한국음악을 가르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국대에서 1년 정도 재직했을 때인 1999년 문화부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 박범훈 단장에 이어 제2대 국립국악관현악단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관을 창설시킨 주역이었으니 만큼 자연스러운 주문이었다. 동국대 강의가 걸림돌이 됐으나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한 교수의 다짐과 설득에 당시 송석구 동국대 총장이 흔쾌히 응해주면서 그는 겸직을 할 수 있었다. 한 단장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의 창의력 넘치는 작곡과 연주 지휘에 힘입어 창극, 무용 등의 장르와 동반 성장하며 "한국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과 ‘강강술래’, ‘대(代)’ 등이 그의 분신들이다. 그는 특히 강강술래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진도 아낙들이 힘든 시집살이의 슬픔과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노랫말과 군무로 씻어내는 놀이문화여서 전국화시켜 국민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애와 한을 해학과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가 표출되는 놀이인 까닭이다. 강강술래의 다양한 버전을 작사작곡해 각계각층에 전파하고 싶어 한다. 기자 역시 대립과 갈등이 있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강강술래 놀이가 확산되면 모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강술래의 아리랑화(化)’일 터이다. 한상일 감독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박사 코스였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때문이었다. Q. 왜 갑자기 동양철학을 공부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A."원래는 예악학(禮樂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어요. 전통음악을 하다 보니 예악의 뿌리와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었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유학대학원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 해석만 배웠지 예악에 관해서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책도 교수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결국 판소리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의 과정을 연구해 그걸로 학위를 취득했다. 억지춘양으로 배운 것들이었지만, 경전 공부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하는 시도에 힘을 보탰던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국악의 보전과 계승, 창작 지원 그리고 해외 진출을 돕는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국악인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현역의 한상일 감독도 환영을 표한다. Q. ‘국악진흥법’은 국악인들의 오랜 숙원이지요. A.-"네, 국악인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거여서 기대가 큽니다. 우리 국악사에 선을 긋는 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국악의 날’을 제정해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길이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희망도 피력한다.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능할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Q.국악이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에 반드시 ‘사미센’ 연주를 동반하고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도 일본 음악을 삽입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한 감독은 대중매체가 좀 더 국악 프로그램 편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큰 힘이 되는 만큼 정책 차원에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피력한다. 아울러 교육 과정에도 국악 악기 연주 코스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불우 청소년 계도 프로그램이던 ‘엘 시스테마(El Systema)’를 도입해 청소년 국악기악단을 운영하던 중 지도 교수의 운영비 횡령 사건으로 중단 돼버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프로그램의 부활을 기다린다. 기자는 국악진흥책 시행을 계기로 세계로 뻗는 K-pop의 흐름에 K-국악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우리 가요가 한국음악 전공자들의 가세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까닭이다.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와 노래, 춤을 바탕으로 하는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도 깊다. 생애 첫 피리 연주곡이 아리랑이기도 했지만, 아리랑이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Q.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A."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아리랑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아리랑을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표현처럼 ‘한민족에게 쌀과 같은 필수불가결한 존재’ 혹은 고난 극복의 수단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한상일 감독은 1989년 무렵 (사)아리랑연합회 창립에 일조하며 임원을 맡으면서 아리랑의 보급과 대중화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발굴과 보존 및 아리랑의 가치 구현에 관심이 크다.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등지로 내몰린 동포들이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 즉, 겨레의 글 한글과 겨레의 민요 아리랑에 의지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그곳 풍경을 담은 아리랑 노랫말을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 그들에게 한글과 아리랑은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범민족 차원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아리랑도 수집해 보존할 생각도 펴고 싶어 한다. 한 감독은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음원을 제작하는 공헌을 했다. 대표 아리랑을 모아 일류 장인들과 연주했다. 올 6월 대규모의 아리랑축제를 상정해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행사가 성사 된다면 수 천 명의 전국 생활국악인들이 대규모 인간띠를 만들어 대합창을 이뤄내는 순간 대한민국은 용트림을 하며 에너지를 뿜어댈 것이다. 우리 속의 편협과 미움을 떨쳐내는 벅찬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한상일 감독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라고 말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여생의 계획으로 ‘아리랑 정신의 구현’을 버킷 리스트의 맨 윗부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다. 한 감독은 자기에게도 그 기회가 닿기를 갈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아리랑을 가져가 30여곡의 ‘일본판 아리랑’을 작곡했다.”라는 일본 매체의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는 창조의 힘만큼이나 보존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놓치게 마련이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 보존과 전승 노력에 절로 박수를 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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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매진' 조성진·임윤찬 공연 보러 해외로…투어 상품도 출시"6월 일본 조성진 리사이틀 보고 얼떨결에 비행기 티켓 질렀어요. 일본 더위 어쩌죠." "원래 5월로 계획된 프랑스 파리 휴가를 3월로 바꾸면 조성진, 임윤찬 공연 관람이 가능해서 바로 결제해버렸어요. 3월보다는 5월의 파리가 좋을 것 같지만…."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스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나 임윤찬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해외 원정'을 감행하는 팬들이 늘어나는 분위기다. 1일 공연계에 따르면 온라인 클래식·여행 커뮤니티에는 조성진과 임윤찬의 해외 공연 정보를 공유하며 관람권과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국내에서는 서울뿐 아니라 대전, 광주, 부산 등 지방에서도 조성진·임윤찬의 공연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보니 상대적으로 예매가 수월한 해외로 눈을 돌리는 팬들이 생겨난 것이다. 실제 임윤찬과 조성진이 무대에 선 모든 공연은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1분 안에 매진돼 티켓을 구하기 어렵다. 지난해 11월 조성진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공연은 최고가 관람권이 55만원에 달했지만 순식간에 동났다. 올해 1월 서울시향과 임윤찬의 협연 공연 역시 매진됐다. 서울시민 50명 초청 이벤트에는 1만6천여명이 몰려 스타 피아니스트의 인기를 재확인했다. 올해 6월 도쿄 산토리홀에서 열리는 조성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간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쓴 인물은 "국내에서 표 구하기 힘들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외국에서 보고 오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고 일본행을 결정한 이유를 밝혔다.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조성진과 2022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해외 순회 중인 임윤찬의 공연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열려 원정을 택할 경우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음향이 뛰어난 공연장과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거장 지휘자들과의 협연을 만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또 해외에서는 오케스트라 협연뿐 아니라 듀오 공연, 실내악 등의 특색있는 공연들도 만날 수 있다. 최근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는 조성진과 임윤찬이 하루 이틀 사이에 잇따라 무대에 오르는 3월 프랑스 파리와 4월 영국 런던 공연이 특히 화제가 되고 있다. 두 사람의 공연을 연달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3월 6일 조성진이 샹젤리제극장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같은 달 6∼7일에는 임윤찬이 '젊은 거장' 메켈레 지휘자가 이끄는 파리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4월 8일에는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임윤찬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이틀 뒤인 10일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로얄페스티벌홀에서 조성진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해외 연주회 수요가 늘자 여행사와 공연기획사들은 관람권을 포함한 여행 상품까지 내놓고 있다. 조성진과 임윤찬의 4월 영국 공연을 포함한 한 관광 상품은 이미 예약이 마감돼 대기자를 받는 상황이다.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임윤찬의 공연 티켓을 포함한 여행 상품도 속속 정원을 채우고 있다. 묶음 여행 상품을 내놓은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백스테이지 투어나 아티스트와의 만남, 전문가 해설 등이 포함되기도 해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수요가 있다"며 "참여자들의 예술 취향도 비슷하다 보니 반응도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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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나의 역사전쟁'동국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윤명철 교수는 행동하는 역사가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직접 몸으로 답사해서 그곳에서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는 방식이다. 윤명철 교수가 지난 해부터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맡으며 중앙아시아 역사에 한국사를 접목하는 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윤명철 교수를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만나보았다. Q. 오랫만입니다.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A. 지난해 7월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있는 국립대학교 고고학과 초청 정식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과목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여러나라의 문화연관성이고요 가을 학기부터는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 신화 등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Q. 벌써 30년 전인가요, 윤 교수님은 젊을 때 똇목을 타고 동아시아 바다를 직접 건너간 것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의 중요 지역을 답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동안 어느 지역을 다니셨습니까? A. 아이구! 뗏목 탐험은 정말 젊을 때 일이고요, 몇년 전에는 경주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투르키에의 이스탄불까지 육로로 자동차 탐험을 한 적이 있고요, 배를 타고 유럽 쪽 북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트핸스 시베리아 열차 탐사를 24일 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Q. 왜 그렇게 많이 다니시는 것입니까? A.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대륙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역사의 풍부한 원형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아득한 시원의 시간동안 민족의 형성과 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생존 조건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내기 위함입니다. 먼저 현장을 가야 공간의 범주를 알 수 있고, 생태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요. 특히 만주 일대는 현장에 가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는 고조선을 원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원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알려면 만주지역을 알고 생태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생태환경이 다르면 생산양식이 달라지고, 생산도구가 달라져요. 생산도구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또 민속,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철학이 달라지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시스템, 정치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고 어떻게 적과 싸웠으며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역사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게 되죠.. Q. 중앙 아시아에서 강의를 하시려면 언어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설마 현지어를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고? A. 아, 물론 제가 현지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요, 다행히 한국에서 오랫 머물었던 유능한 현지인이 통역을 해주셔서 가능합니다. Q. 여전히 궁금한 것은, 아직 긴 기간은 아니지만 타국에 가 계시면 힘들텐데요? 윤: 네 그렇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같이 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우리 70년대처럼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아서 집사람이 아주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회가 돠면 와서 살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그 나라에서 우리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윤: 관심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자유시장 경제로 성공한 사례인데, 그 나라는 소련이 무너진 뒤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인 만큼 한국의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의외로 한국을 다녀온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수도 같은 데서는 스무 명 중 한 명 꼴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있는 곳도 있어요. 이곳 분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한국에서도 좋아했고요, 돌아와서도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환영하고 뭐라도 도와주시려고 해서 고맙습니다. Q. 사마르칸드라고 하면 아프라시압의 벽화무덤 속에 있는 한반도의 무사 그림이 유명한데,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A. 아프라시압은 6~7세기 그 일대의 수도로서 번성하다가 사마르칸드로 중심무대가 옮겨진 곳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구려인이라고 봐야지요.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이후라고 본다면 5~7세기인데 당시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은 소그드인들이고 이들이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중국 당나라를 잇는 핵심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와도 그때부터 교류가 있었고요. Q.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물자만 오고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A. 그렇습니다. 당나라 역사에 소그드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유명한 이태백의 시에도 이들이 추는 춤인 호선무(胡旋舞)가 등장할 정도인데, 그들을 통해서 음악, 악기, 춤, 서커스, 그리고 음식재료와 조리방법 등 삶의 곳곳에서 교류가 이뤄졌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고구려도 이런 문화의 유입이 많았고요, 고구려 벽화 고분을 보면 그런 장면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교류의 역사도 현지에서 더 새롭게 발견하고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우리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쪽 문화가 들어오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더 북쪽 아닌가요? A. 근세 유럽인들이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사막 남로와 북로를 개념화했습니다만 저는 그 문물의 이동과 교류의 핵심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고 '오아시스로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막이건 초원이건 오아시스가 없으면 길이 열리지 않으니까 이제는 넓은 시각의 오아시스 로드라는 측면에서 이 지역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을 제가 하고 있고요. Q. 우즈베키스탄에서 TV출연 등을 많이 하신다고 하던데 A. 네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문명의 길목의 주인공이었던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나서서 알려드리고 있고요. 이들을 통해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말하지요. 나아가서는 그 옆에 투르키예인들의 나라와 역사가 있었고 이들 역시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많이 연결돼 있어서, 그들의 후예인 투르키에 인들이 우리를 형제나라라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역사와 문화의 교류를 새롭게 찾아내고 의미를 알리는 일입니다. Q. 하실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해 초에는 미국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신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A. 네 지난 2월 예일대 특강 때에 역사에 대한 저의 지론인 ‘ 행동학’을 강조해서, 참석자분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역사를 잘 모릅니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은 역동적인 노마드 문화와 농경 정착문화가 복합된 모스테빌리티(Mostability)형 문화”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또 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시기 중만주까지는 직접 통치하고, 그 너머의 지역은 해당 지역 사람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는, 그러니까 여진족, 말갈족들이 용병으로 동원되었죠. 하지만 그 북쪽인 서북 만주 같은 경우는 간접 영향권일 뿐이에요. 이들 북방민족이 중국으로 건너가 요, 금, 원, 청과 같은 정복국가를 세웠지만 우리는 요동과 한반도를 고수했어요. 우리가 힘이 있지만 그 쪽을 굳이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홍익인간’의 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하는 문명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진출한 해륙국가라는 ‘동아시아 지중해 모델’에 대해 설명을 했고 거기에 참석자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시아의 바이킹’으로 불렸던 발해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해양문화의 특성은 보존되지 않는 것인데, 발해의 조선술에 관해서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배는 바이킹의 배와 비슷했을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Q. 밖에 나가계시면서 국내활동도 하신 것 같던데, 김지하 선생을 추모하신다고요? A. 추모를 넘어서서 그를 사상가로서 재조명하는 작업입니다. 지난 5월 초 1주기를 맞아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한 학술포럼을 연 바 있습니다. 김지하 씨는 민주화운동가, 혁명가, 시인, 사상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한국 현대사에 큰 위상을 남겼고 평생을 인권, 자유, 양심, 민족, 문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했으며, ‘생명사상’이라는 자기의 논리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김지하씨는 이제 사상가로서 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의 특정 발언이나 행위, 선택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 씨는 소년 시절부터 말년 혹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삶을 살았다. 진실을 찾으려 했고,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소명감이 강했습니다. 지금 한국인에게는 끝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실현시키는 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김지하의 사상과 문학, 사회적 삶은 미래 세대의 모델로서 필요하고요, 지금 우리 한국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를 극복할 ‘사상’과 이를 이끌어 갈 사상가로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Q.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강의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신다고요 A. 네 한국에서 근무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초청해서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코리안 데이’를 준비해서 10월19일에 사마르칸트시에서 엽니다. 사람과 음식, 음악, 풍습 등을 교류하는 자라입니다. 또 한국에서 발칸반도 99일간 99개국을 찾아가는 '유라시아 플로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플로우(flow)는 흘러가다라는 뜻이 있죠. 바로 우리 민족의 풍류 사상을 유라시아 플로우라고 바꾼 겁니다. 그래야 서양인에게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신라 대학자 최치원이 "우리 민족에게 유‧불‧도(儒佛道)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라고 했던 바로 그 풍류입니다. 당연히 풍류는 홍익인간 사상이죠.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이잖아요. 물류죠. 그리고 플로우는 종횡무진을 뜻합니다. 그동안 실크로드, 초원의 길이라고 하나의 길, 횡단 길이라고 보았지만 아닙니다. 문명은 종단로도 있었어요. 그런 네트워크를 찾아가는 작업니다. Q. 윤 교수님은 천산 알타이 등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제가 중앙아시아를 중요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는 중앙아시아가 우리의 21세기 생존전략의 주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의 보고이고요 무한한 시장이 열릴 곳이기도 하고요. 그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원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문명 이전 인류문명의 모델로서 천산과 파미르 고원일대의 삶의 조건과 거기서 펼쳐지고 지켜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살려보는 것입니다. 제가 추진하는 '유라시아 플로우'도 그 일환입니다. 단순히 탐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가 되는 페스티벌도 열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의 시발인 원조선을 다시 보고 중앙아시아의 흥먕성쇠가 우리 역사와 어덯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고 이들과 우리의 인연을 현재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Q. 아, 말씀이 끝이 없습니다. 나중에 또 듣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우리민족에 대해 어떻게 보시고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열어가면 좋은지 듣고 싶습니다. A. 옆 동네인 키르키즈스탄에서는 K-팝 경연대회를 일 년 마다 열고 있는데 참가팀이 100팀이 넘고 수준도 놀랄 정도입니다. 이렇듯 우리 문화의 힘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힘은 역동성과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구려문화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화는 단순히 연결 시켜주는 브릿지, 혹은 교량이 아니라 다시 가공하고 키워내는 교차로 입니다. 최근의 우리 한류가 그걸 말해주고 있지요. 우리 문화는 이제 중앙아시아를 바로 가로 질러 유럽까지 이어지는 문화오아시스로드의 동쪽 기점이자 샘입니다. 이제야말로 문명사적으로 말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지정학적인 문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담아 새로운 문화로 다시 키워내야하는 시대입니다. 좁은 국내, 정치의 잘못된 연못에서 나와서 세계에 맑은 물을 집어넣어주는 문화창조의 중심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음을 넓히고 눈을 멀리 두어야할 것입니다. Q. 역사학자로서 밖에 나가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A. 역사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사대주의와 연구방법론에 대한 교조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개방적이고 자신있는 태도로 현실과 역사에 책임감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학과 역사학의 본령(本領), 또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학이 다른데 우리는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 역사학의 본령이라고 오해했던 측면이 많습니다. 주체적인 동아시아 역사상을 확립해야하고, 지구문명사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한국적인 견해와 해석도 자신있게 펼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즉 ‘동아시아 담론’ ‘지구담론’을 펼쳐야 하며, 특히 고대사연구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원형과 인류의 발전모델로 찾아내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Q. 좋은 말씀 많이 잘 들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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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 80여 년 걸려 우리에게 온 화가그림 한 점이 시선을 붙잡았다. 젊은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이었다. 남편은 이 그림이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북으로 가버렸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임군홍(1912~1979) 화백과 첫 대면을 했다. 1950년 작품이다. 화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해 화가는 북으로 넘어가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했다. 기자는 그림 속 두 살배기 아이에게서 슬픔을 느꼈다. 7월 27일부터 두 달간 열리는 ‘임군홍 전’을 준비 중인 압구정동 예화랑에서 74세의 장년이 된 그를 만났다. 아들은 그림의 전후 사정을 어머니와 7살 위 형에게서 들어 "그랬구나”라고 느낄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이나 서러움 같은 건 달리 내비치지 않았다. 들은 이야기와 사진, 그림들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줄곧 그려온 까닭이었을 것이다. 백부로부터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어머니로부터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백부는 동경 유학까지 갔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집안의 결혼 강요 탓에 의기를 꺾었던 사연을 안고 있어 더욱 화가 동생의 불행을 가슴 아파했다. 임군홍은 김환기, 이인성, 이중섭, 박수근 등 20세기 초반의 대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박수근처럼 그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주교공립보통학교 시절 미술교사였던 김종태1906~35와 윤희순1902~?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에 눈 떴고, 졸업 후 치과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하면서 경성양화연구소에서 약간의 수업을 받은 게 미술 공부의 전부였다. 김종태는 야수파 화풍을 보이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한 후 이듬해 ‘포오즈’로 특선을 차지하여 연이어 여섯 차례에 걸쳐 특선을 차지한 스타 화가였고, 윤희순 역시 평론가로도 활동한 유명 미술인이어서 임군홍의 기초를 탄탄하게 잡아주었다. 특히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의 아웃 라인을 잡는 건 스승 김종태의 기법과 꼭 닮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미술잡지들을 통해 인상파와 야수파, 표현파들의 그림을 살피는 것도 공부였다. 임군홍은 1931년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입선한 후 1936년 ‘여인 좌상’으로 다시 입선하고 이듬해에 ‘소녀상’으로 또 입선한다. 이후부터 1941년까지는 풍경화로 해마다 입선을 거듭한다. ‘소녀상’은 사귄 지 1년 된 결혼 전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렸다. 연이은 입선 후 그는 아내에게 비취반지를 선물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아내는 반지를 낀 손을 곧게 펴 자랑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행복한 시기였다. 간호사이던 아내 홍우순(1915~1982)과는 치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현재 가수이면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솔비의 이모할머니이다. 1938년까지 3회의 동인전과 한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 본명인 수룡(水龍)을 버리고 군홍(群鴻)으로 활동한다. 나머지 두 아들도 이름을 득용(得龍), 점용(點龍)으로 지었을 만큼 유가의 집안임을 자부했던 부친의 뜻을 저버린 셈이었다. 자신이 집착한 용을 마다하고 기러기를 택한 아들의 결정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혹시 ‘군계일홍(群鷄一鴻)’의 뜻이었다면 수긍해 주셨을까. 임군홍은 1939년 돌연 중국행을 택한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벌 생각으로 광고디자인 사업을 병행하던 중이었다. 넓고 큰 중국 시장에서 빠른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만주와 북경을 거쳐 호북성 무한에 터를 잡았다. 최고 번화가인 화루가(花樓街)에 회사를 차려 사진 인화, 광고, 인테리어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 서화가들이 중국에 남긴 작품들을 찾아서 파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수집 차 여러 번 그의 가게를 찾아오곤 했다. ‘꽃으로 단장한 거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의 거리는 미감을 중시하는 화가와 잘 맞았을 것이다. 실제 임군홍은 이 거리의 풍경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루가 골목의 풍경을 담은 그림에 등장하는 간판의 ‘照相放大’가 ‘사진 인화 확대’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자 임 선생의 차남 임덕진(1948~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덕분에 그 가게가 아버지 회사였음을 알게 됐다”라는 것이다. 임 화백은 그렇게 주변 풍경들에 마음을 주며 하나씩 그려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재래시장의 정육점을 담은 풍경화는 1941년 선전에 입선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사업과 그림을 병행했다. 이 시기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그린 그림들 가운데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금성 연작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기자가 북경특파원으로 주재하던 시절 자주 찾았던 장소에서 자금성을 그렸다. 다름 아닌 자금성 뒤 경산(景山)이었다. 궁궐 옆에 북해 호수를 만드느라 퍼올린 흙으로 조성한 인공산으로서 우리 창덕궁 후원처럼 명 황제 일가의 휴식처였다. 명明 말기 대기근과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자금성으로 진격해 오자 겁을 집어 먹은 숭정제는 뒷산으로 달아난다. 한참 자금성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나무에 목을 매단다. 황제로서는 처절한 최후였다. 이 경산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풍경이 압권이다. 2km에 달하는 궁궐 전각들의 황금색 기와들이 일제히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왜 산 이름에 ‘경치 경景’ 자를 붙였는지 절로 이해가 되는 곳이다. 기자도 수시로 이곳에 올라 고궁을 내려다보면서도 단 한 번도 싫증을 낸 적이 없었다. 임 화백의 고궁 그림을 보면서 그는 왜 이곳을 그렇게 여러 번 올랐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에 살고 있던 게 아니라 1,250km 떨어진 무한에 살면서 수시로 이곳을 찾기란 보통의 꽂힘이 아니고선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경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숭정제의 비극이 깃든 역사가 서린 곳인 데다, 자금성의 미감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인트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나, 짐작한다. 임 화백은 자금성 네 귀퉁이에 3층 높이로 서 있는 누각들에도 시선을 주었다. 공사 설계자가 디자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누군가의 "여치 조롱에서 힌트를 얻어 그대로 지었다”라는 후일담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건축물이다. 역시 조형미 덕에 세련된 미감이 감지되는 건축물이다. 임 화백은 천자天子의 상징인 천단天壇도 여러 번을 찾아 다양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겼다. 이 시기 베이징을 자주 찾던 그는 저명한 일본인 화가들인 야자키 치요지(矢崎千代仁, 1872~1947),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와 교분을 쌓는다. 각각 제국미술회 회원과 동경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이들이다. 그들 역시 자금성과 천단을 그린 점으로 미루어 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다 서로 사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야자키는 파스텔화로, 우메하라와 임군홍은 유화로 대상들을 묘사했다. 야자키는 임군홍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정도로 친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온 임 화백은 ‘고려광고사’라는 광고·디자인·인쇄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했다. 서울의 첫 디자인 회사였다. 사업은 원만했으나 좌우 충돌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1947년 그는 용공분자로 몰린다. 좌익계 남편 안막과 동반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운수부(국토교통부)에서 주문받은 신년 달력에 올린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최승희의 지명도만을 생각했던 그는 자신에게 찍힌 ‘용공’ 낙인에 좌절한다. 1948년 옥에서 풀려났지만 혼탁한 해방공간에서 더 이상 남한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일단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에 택한 북한행이 가족과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는지 임 화백은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가족’에도 두 살배기 아들은 엄마 팔에 안겨 잠들어 있다. 7살 많은 형은 뛰어노느라 빠졌고,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두 살 터울의 누나는 한 곁에서 뾰로통한 표정이다. 탁자 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늘려 있다. 임 화백이 좋아했던 독일제 맥주 컵은 꽃을 꽂아 정물화에 여러 번 등장하고, 램프와 도자기, 항아리 등도 애용하던 소품들이었다. 그가 떠난 후 생활고를 겪던 모친이 시장에 내다 팔면서 모두 사라졌다. 둘째의 초상화 앞에서 기자는 먹먹해졌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낡은 액자를 뜯고 그림을 끄집어 내려하자 또 한 장의 그림이 뒤에 붙어 있었는데 고양이 그림이었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배기를 두고 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 뒤에 수호신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본다”라는 원모심려(遠謀深慮)의 마음을 길 떠나는 아버지는 비장의 그림으로 대신했다. 꽁꽁 묶여 보관돼 오던 임군홍 화백의 그림 120여 점이 그린 지 80여 년만에 우리에게 제대로 공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그의 천재성이 조명되고, 일반이 접하기 쉽도록 기념관이 건립됐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말한다. 73년 전 아버지가 숨겨둔 수호신 덕에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가 있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덕진 씨는 "아버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왔다”라고 말한다. ‘고양이 수호신’은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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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통 국악신문국악신문(www.kukak21.com)은 1994년 5월 26일 ‘국악의 해’에 창간한 30년 역사의 전통문화 신문이다. "전통예술 보급에 앞서가는 신문”을 사시로, 설장고의 명인 김병섭의 차남 호규 명의로 창간하였다. 성악 · 기악 · 무용 · 연희 분야 및 한복 · 한식 등 분야를 대상으로 민족음악 · 민속학 · 한국학 · 문화학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2020년 6월 21일 김지연을 발행인, 기미양을 편집인으로 ‘인터넷 국악신문’으로 재창간, 편집부 · 광고부 · 사업부 체제로 운영하였다. 2021년 8월 30일 기미양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변경, 경영 합리화를 위한 법인 체제로 전환하여 10월 1일 '주식회사 국악신문사'로 확장하였다. 현재 사업부 외 5개 부서와 대기자와 주필 직을 신설하여 30년 전통문화 전문신문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유튜브 '국악신문TV'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주식회사 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인터넷 등에 검색되는 ‘국악신문사’와는 혼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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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 정신이 담긴 한국어로 ‘제2의 중동 붐’ 뒷받침한다문화체육관광부는 세종학당재단과 함께 23일부터 25일까지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에서 ‘2023 중동·아프리카 세종학당 워크숍’을개최한다. 이는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 순방을 계기로 출범한 문체부 ‘제2의 중동 붐 TF’를 통해 논의된 후속 조치의 일환이다. 이번 워크숍에는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소재한 18개국 20개소 세종학당 관계자를 비롯해 현지 한국어 교육 관계자 150여 명이 참석한다. 참석자들은‘한국어로 함께하는 중동·아프리카의 미래’를 주제로 한국어·한국문화 교수법강의를 듣고 세종학당을 통한 한국어 확산 우수사례를 공유하며 해당 권역내 한국어 교육 협력체계를 공고히 한다. 특히 이번 워크숍에서는 전 세계 세종학당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본교재인 「세종한국어」 개정본의 특성과 활용법을 강의해 새로운 교재가 현장에서 더 빠르게 보급·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세종한국어」는 2013년에 초판 발간된 이후 9년만인 지난해 9월에 전면 개정됐다. 올해 2월부터 정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메타버스 세종학당’의 활용방안 강의도 진행한다. 이 특별강의는 최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다채로운 한국어 교육 방식을 소개해참석자들의 관심과 호응이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이번 워크숍을 계기로 재단과 샤르자 정부관계부는 양해각서(MOU)를체결한다. 이를 통해 아랍에미리트 내 한국어 확산을 위한 상호협력을 강화하고 6월에는 정부관계부 관계자의 방한을 계기로 구체적인합의각서(MOA)를체결, 현재 세종학당이 없는 샤르자 지역 내에 세종학당을 새롭게 지정하는등 실질적인 후속 성과를 창출할 계획이다. 국외 한국어·한국문화 보급 및 확산 대표 브랜드인 세종학당은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 84개국 244개소가 지정되었다. 지난해 세종학당 강좌를 수강한 수강생 수는 총 117,636명으로 최초로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코로나19로 위축되었던 대면 교육과정이 지난해를 기점으로 정상화된 데에,재단의 한국어 교원 적시 파견 등을 통한 대기자 수 해소 노력, K-컬처 인기에 따른 한국어 학습 수요의 지속적 증가가 합쳐진 결과이다. 문체부는이번 워크숍이 끝나면 재단과 함께 6월 중에 2023 신규 세종학당을 지정해이러한 한국어 학습 수요 확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문체부 정향미 문화정책관(제2중동붐 TF 팀장 겸임)은 "중동은 성장잠재력이 큰 지역으로, K-컬처를 중심으로 한 양국 간 교류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번 워크숍을 계기로 현지 한국어 확산 분위기를 폭넓게 조성함으로써 한국과의 문화·인적 교류 확대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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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한국문화 배우는 ‘세종학당’ 수강 대기자 1만 명 돌파지난 1월 미국매체 CNN방송에 따르면 한국어는 2022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로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교육하는 ‘세종학당’ 수강 대기자가 1만 명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1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승수, 더불어민주당 이병훈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세종학당 수강 대기자는 9149명으로, 강의를 듣기를 원하지만 등록대기를 하지 않은 인원까지 포함하면 1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지난 1월 미국 CNN이 글로벌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인 듀오링고를 인용해 보도한 바 따르면 한국어는 지난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다. 한국어는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특히 큰 인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CNN은 지난 20년간 K-팝과 드라마, 화장품, 패션, 식품 등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며 음악과 미디어 등을 통해 문화 영향력을 퍼트리려 한 한국 정부의 노력도 한몫했다고 진단했다.정부는 2012년 국어기본법에 근거해 국외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보급 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세종학당재단을 설립했다. 2012년 전 세계세종학당은 43개국 90곳, 수강생은 2만8793명이었다. 이후 연평균 약 11% 증가, 지난해에는 84개국 244곳의 세종학당에서 연간 8만명이 한국어를 배웠다. 그동안 세종학당을 거쳐간 수강생은 누적 약 66만명이다.세종학당에서 공부하고 한국과 한국문화에 매료되어 활동을 이어가는 있는 사례들도 많다. 프랑스 문화원 세종학당 출신인 마포로르씨는 한국민요 판소리를 홍보하는 외국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멕시코문화원 세종학당 출신인 낸시 카스트로씨는 경기민요 소리꾼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 학당 출신인 풍 투 차는 KBS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에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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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세종학당’으로 한국어를 말하고 배워요문화체육관광부는 세종학당재단과 함께 올해부터 ‘메타버스 세종학당'을 정식으로 운영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세종학당재단은 K-컬처의 높은 인기로 한국어 학습 수요자가 증가함에 따라 올해부터 메타버스 세종학당(http://ksif.zep.site)을 본격적으로 운영한다고 7일 밝혔다. 문체부는 세종학당 수강 대기자 수가 지난해 9월 기준 1만 명에 육박해 메타버스 세종학당이 한국어 학습 수요자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생활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한국생활 360° 가상현실(VR) 영상'과 한국어·K-컬처 체험 게임 콘텐츠도 즐길 수 있다. 문체부와 재단은 K-컬처의 높은 인기로 전 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한국어 학습 수요에 전방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한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동시에 K-컬처를 체험할 수 있는 ‘메타버스 세종학당’을 구축했다. 현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세종학당의 수강 대기자 수가 1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22년 9월 기준, 9,148명)을 고려할 때,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잠재적인 한국어 학습 수요자들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세계적으로 연대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개발도상국 등 정보기술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학습자들도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구축했다. 3차원(3D)보다 대규모의 동시접속자 수를 수용할 수 있는 2차원(2D) 그래픽 기반의 무료 플랫폼을 선정하고, 웹(Web) 기반으로 구성하여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누구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 한국어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동, K-컬처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동,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행사동 등으로 구성된 ‘캠퍼스 공간’과 ▲ 한국 일상생활을 체험하면서 한국어 말하기 활동을 할 수 있는 ‘마을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공간’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역, 한강공원, 광장시장 등 한국의 대표적인 명소도 있어 외국인들의 한국 방문에 대한 의욕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각 공간은 현지 세종학당에서 실제로 활용하고 있는 기본교재인 ‘세종한국어 회화(재단 발간)’의 학습 과정과 긴밀하게 연계해 구성한 만큼 학습자들은 다양한 대화 공간에서 몰입감 있게 말하기 연습을 할 수 있다. 문체부와 재단은 지난해 11월 25일부터 12월 31일까지 ‘메타버스 세종학당’을 시범 운영했으며, 서비스 공개 당일 총 4,643명이 방문한 것 외에도 총 123개국에서 일일 평균 학습자 480명이 접속해 한국어로 소통하는 성과를 얻었다. 파라과이에서 ‘메타버스 세종학당’을 이용한 루지아 씨는 방명록 기능을 활용해 한국어로 "메타버스로 한국어를 연습하는 게 재미있다. 덕분에 K-컬처에 대해 더 알고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랑 대화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라며 만족감을 표현했다. ‘메타버스 세종학당 정식 운영 기념행사’는 전 세계인들이 메타버스에서 뜻깊은 순간을 함께할 수 있도록 콘텐츠문화광장 현장뿐만 아니라 메타버스와도 연계해 진행한다. 재단 홍보대사인 다니엘 린데만, 알베르토 몬디, 럭키 등 3인은 문체부 2030 자문단과 함께 ‘메타버스 세종학당’ 캠퍼스를 탐방하고 시범 운영 당시에는 공개하지 않았던 방 탈출 지도(맵)를 새롭게 체험할 계획이다. 또한 메타버스 참여자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한국 전통놀이인 제기차기와 한국어 OX 퀴즈 이벤트를 진행하고, 축하공연으로 퓨전 국악을 선보인다. 정식으로 운영하는 ‘메타버스 세종학당’에서는 방 탈출 지도(맵) 외에도 한국 생활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는 ‘한국생활 360° 가상현실(VR) 영상’ 2종을 먼저 새롭게 공개한다. 이후 매월 순차적으로 한국민속체험마을, 놀이동산 등의 새로운 지도(맵)와 ‘한국생활 360° 가상현실(VR) 영상’ 12종, 한국어·K-컬처 체험 게임 콘텐츠 3종을 공개해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즐길 거리를 계속 제공할 예정이다. 한편 문체부는 올해 국외 한국어·한국문화 확산을 위한 대표 브랜드인 ‘세종학당’ 관련 예산으로 전년 대비 30억 원 증액한 562억 원을 반영했다. 온·오프라인 세종학당 수강생 수를 확대하기 위해 ▲ ‘메타버스 세종학당’ 정식 운영 등 비대면 학습기반을 확충하는 한편, ▲ 한국어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현지 세종학당을 전략적으로 확대하고, ▲ 한국어 학습 유인을 제공할 수 있는 한류스타 연계 웹 콘텐츠를 제작·활용할 계획이다. 문체부 윤성천 문화예술정책실장은 "K-컬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제 최신 기술을 활용한 ‘메타버스 세종학당’을 통해 전 세계인이 더욱 쉽게 한국어를 학습할 기회가 무한히 확장됐다.”라며, "지난해 15만 명 정도였던 세종학당 수강생 수를 2027년까지 50만 명으로 증대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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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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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훈 석좌교수, '한국음악의 새길 찾다'8월의 한가운데, 창밖의 일기 변화에 눈을 두지 않고 연구실에서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분. 국악인. 작곡가, 지휘자, 국악학자, 대학총장, 교육문화정책가, 다시 국악학자로 돌아와 연구실을 지키는 박범훈 석좌교수. 최근 동국대 서울캠퍼스에 ‘한국음악학과’ 개강 준비와 전임교수, 석좌교수 내정 등으로 분망(奔忙)한 틈에 KBS기자 시절부터 친분을 가진 이동식 대기자가 찾았다. 80분 간의 인터뷰에서 그의 화두가 종립대학(宗立大學)으로써의 불교음악 진흥이 곧 우리 음악 새길 찾기임을 확인했다. 이제 그의 공안(公案)을 함께 하기로 한다. Q. 이동식 대기자- 이 염천에 피서 안가시고 무얼 하십니까? A. 박범훈 석좌교수- 반갑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학생들을 모집하는 예술대학 한국음악과의 개설에 차질이 없도록 제반 사항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학과 개설은 일이 많지요. 우리 학과는 다 수시모집으로 신입생 모집이 이뤄지는데 그게 딱 한 달 남았거든요. 새 학과의 비전과 설립목적에 맞는 교과목의 교육내용과 방법, 교수확보, 또 전형방법의 확정과 구체적 평가기준의 숙지 등등 하나하나가 다 확인하고 점검해야할 일이니까요. Q. 이- 동국대학교는 원래 경주캠퍼스에 한국음악과가 있었는데 서울 한복판에 새로 학과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의외입니다만. A.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예술관련 학과는 관계되는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운영되지 않으면 교수진 확보나 학생들 수업 등에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학이 불교 조계종이 설립한 종립대학인데 그동안 지역(경주캠퍼스)에 있으면서 불교음악의 진흥이라는 차원에서는 미흡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당국이 기왕이면 불교음악의 바탕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고 가르쳐 한국음악의 새 길을 열기 위해서는 뛰어난 예술인들이 선생님으로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서울 한복판에 한국음악과를 신설하자고 해서 성사된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도권에는 대학의 정원이 늘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대학으로서는 종립대학으로서 그동안 조금 미진했던 불교음악의 연구와 연마를 배양해서 이 시대 세계가 환영하는 한류, 우리나라가 요구하는 한국음악의 인재들을 키워내야 할 시점이라는 고심을 한 끝에 기존의 정원을 돌려서 서울에 한국음악과를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Q. 방금 불교음악을 통해 우리 음악을 키운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아는 불교음악은 이를테면 찬불가라던가 범패, 염불, 또는 김영임이 불러 유명해진 회심곡 등등 특정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음악의 주류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요? A. 한국음악의 바탕은 곧 불교 음악입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민족과 1500년 이상 같이 살아온 불교이기에 거기에서 만들어지고 남아있는 가락과 사설과 장단 등 전통음악의 요소인 가, 무, 악 3요소가 모두가 어느 새 우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 있고 그것이 현대에서도 알게 모르게 발현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음악이란 개념을 접한 것도 불교경전을 통해서였고, 염불이나 범패뿐 아니라 국악에서 연주하는 영산회상, 회심곡, 비나리, 탑돌이, 산염불 등 민요가 다 불교음악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이미 우리음악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 시대 우리들의 예술적인 재능으로 다시 피워내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모집인원이 15명이라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왕이면 우수한 교수진들과의 직접 교육을 통해 최고의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목표입니다. Q. 그럼 교수진들은 다 확정이 되었나요? A. 나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이 다 망라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김덕수 안숙선을 비롯해 김영재, 김성녀, 박애리, 이춘희, 김해숙 등등 성악, 기악, 무용, 작곡 부문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다음 오는 9월에 학생들을 모집해서 내년 3월에 학과의 문을 열게 됩니다. Q.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에 국악과 혹은 한국음악과가 있어 국악계의 인력수요가 포화상태가 아니냐는 걱정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최근 우리나라가 반도체나 원자력 분야를 키워나가려고 보니까 절대 인력의 배출구조가 없어서 인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음악의 현주소는 한류라는 현상으로 기대에 차 있는데, 이런 추세에 맞추려면 새로운 인력, 인재들이 더 많이 나와야지요. 그 인재들은, 과거의 것을 연주하는, 말하자면 답습의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야하는 것이고요. 잘 보시면 우리 전통음악은 언제나 창작음악이었습니다. 그것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대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음악들을 이미 만들어서 전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 전통의 힘을 찾아내어 이를 다시 재창조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최근 사이의 곡 '강남스타일'이 휘몰이장단을 바탕으로 했기에 세계인들에게 먹혀들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 그 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주는 물론이지만 각 분야에서 새 음악을 만드는 역량을 극대화하는 작곡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 학교는 교수진들이 학생들에게 1 대 1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도록 합니다. 거기에 국립극장이 가까이 있으니 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움으로서 이 시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량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Q. 일각에서는 현재의 우리 아이돌의 인기나 한류가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해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도 하던데요 A.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것으로, 서양음악도 그 모체는 종교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천주교)가 서양의 음악문화를 탄생시켰기에 서양음악의 모체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음악은 불교가 그 모체이지요. 서양음악은 그런 바탕에서 민족적인, 지역적인 음악을 흡수했지요. 헝가리, 핀란드, 러시아, 스페인 등의 민족음악들이 19세기 중반 이후에 서양음악의 본류로 올라가서 현재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음악은 불교가 그 바탕에 있는 것이고, 이제는 아시아의 민족음악들이 세계음악으로 올라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이제 현대음악, 세계의 음악으로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Q. 그런데 어디까지가 우리 음악이냐 하는 문제가 늘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만···. A. 아, 그거요, 음악이건 문화건, 새로운 것은 본질적으로 비빔밥입니다. 우리 비빔밥을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에 고명으로 나물을 갖가지 넣고 참기름도 넣고서 마지막에 고추장을 넣어 비비는데, 그게 핵심이지요. 그 고추장을 얼마나 넣느냐의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우리 음악의 고추장이 들어가면 그게 곧 우리 음악이지요. 그럼 그 고추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고 또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요소별로, 즉 장단이나 곡의 형식, 음계문제, 소리를 내는 방법, 몸짓에 따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을 잘 하면 그게 최고의 우리 음악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요소들을 우리가 알아내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Q. 너무 학과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 아시다시피 코로나로 우리 국악계, 전통음악계가 공연 취소, 관객 감소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최근에는 조금씩 회복되긴 하지만, 이거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해결 방법이 있나요? A. 하하. 음악이나 민속을 통해서 보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귀찮게 하는 대상을 우리는 별신, 잡신으로 규정하고 이를 굿으로 보내는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까지 힘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슬플 때에 노래로 이겨내듯이 우리는 이 위기를 별신굿을 해서 추방해야 하죠. 그것은 해학이자 우리들의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Q. 우리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서양악기가 워낙 표현력이 강해서 우리 악기가 따라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서양악기와 우리 악기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음악의 한계를 미리 규정짓는 일이 아닐까요? 전에 남북한 음악회를 평양에서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첼로 연주자가 한복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서양악기와 전통악기가 공존하고 있더라구요. 오자와 세이지라고 하는 지휘자, 세계적인 서양음악의 지휘자이지요. 그 양반이 중국에 왔다가 얼후(二胡)의 매력에 푹 빠져 중국 연주자를 보스턴에 초청해 보스턴 오케스트러와 협연을 열어준 일이 있고, 그 이후 얼후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제는 악기나 양식의 구분을 넘어서서 원하는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지혜가 있어야하지요. 이미 외국에서는 그런 쪽으로 많이 음악세계가 넓어지고 있고요. 그것은 악기나 형식에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우리의 음악에 '복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말은 북한식 어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동양 3국만 해도 각각의 민족적인 특징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들을 필요하면 끌어 쓰고 넘치면 버리고 해서 보다 보편적인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Q. 그래도 우리들은 아직 일본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감정이 있고, 요즈음에는 일본 엔카(演歌)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요. A.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우리 음악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인 것 같고. 그렇게 그들의 음악으로 되었는데 우리도 중국 음악이나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또 우리 식의 음악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아요? 일본 엔카의 원류에 대해서는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인천에서 살았다는 전력이 있고 최근에는 한국인이라는 설까지 나오기는 하지만, 엔카의 기본 음계는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 것을 베꼈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도 있지요. 그것은 연구가들이 밝힐 일이지만 누가 원조니 어디가 어디를 베꼈니 하는 민족적인 감정에 함몰되기 보다는 그런 저런 요소들을 우리가 다 어떻게 우리 것으로 수용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중일 세 나라 음악인들이 함께 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악보로 보면 음악의 표현이 살지 못하는데 함께 손잡고 연습하고 부르고 하면 다들 마음이 통하고 음악이 멋지게 나오더라고요. 각 나라의 장점을 흡수하고 이를 현대에 다시 살리는 작업, 그게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이지요. Q. 이런 저런 궁금한 점을 묻다 보니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한국음악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데, 더 많은 창작이나 후진 양성으로 우리 음악이 당당히 세계에 퍼지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A. 네 급한 김에 저도 두서없는 말을 했습니다만, 우리 음악은 언제나 늘 시작입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새 음악으로 국악만이 아니라 넓은 한국음악을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요즈음 대학의 학과가 거의 다 한국음악과라는 이름을 택하는 데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음악을 찾고 만들어가야 하고, 우리 동국대의 한국음악과 창설이 당대 최고의 지도자들에 의해 그런 희망과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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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인턴 기자단, 박범훈 前 총장님과의 만남‘대기자 인터뷰’ 코너 이동식 대기자 취재 현장에 국악신문 제2기 인턴기자 전소화, 천웅비, 린다 3인이 함께했다. 12일 오후 3시부터 80여 분간 동국대학교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최근 저작 '박범훈의 불교음악 여행'을 기증 받았다. 박범훈 전 총장과의 인터뷰 기사는 월요일자 본보를 통해 게재된다. 동국대학교 서울 캠퍼스 한국음악과 개설에 대한 소식 등이 전해진다. 촬영은 김동국 기자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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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동식 대기자가 찾은 BTS의 ‘아름다운 선언’"이 지구는 성공한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지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치유해주는 사람들, 회복시켜주는 사람들,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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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문체부장관 오늘 취임식…향후 과제는?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6일 취임식을 갖고 윤석열정부의 문화·체육 관련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한 본격 행보에 돌입한다. 박보균 장관은 이날 오전 윤석열 대통령 국회 시정연설에 참석한 후 정부세종청사로 이동, 오후 3시에 취임식을 갖는다. 17일에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참배한다.박 장관은 취임 후 실·국장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으며 문체부 현안 파악에 나선다. 이어 윤석열 정부 초대 문체부 장관으로서 문화·체육 관련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한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에 돌입한다.윤석열 정부는 지난 3일 '문화공영으로 행복한 국민, 품격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국정목표 아래 ▲보편적 문화복지 ▲예술인 지원체계확립 ▲전통문화유산 가치제고 ▲K컬처의 초격차 산업화 등 7대 국정과제를 제시했다.박 장관은 K팝·K드라마 등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K콘텐츠 강화에 나설 전망이다. K콘텐츠를 초격차 산업으로 육성, 2027년까지 매출액 200조원, 수출액 230조원, 한류팬 2억명을 달성한다는 목표다.국민들의 문화기본권 보장을 위해 공연관람·도서구입·신문 구독 등에만 적용됐던 문화비 소득공제를 스포츠 관람·영화·체육시설 이용료로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중장년 청춘문화공간, 사회적 관계 회복 지원센터 등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 확대를 위해서도 노력한다. 지역간 문화격차를 해소하는 일에도 매진할 전망이다. 지역중심 문화거버넌스를 확립하고, 문화를 통한 지역발전 선도모델 확산에 나선다. 과거 박근혜정부 당시 벌어진 '블랙리스트 악몽'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우려를 불식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박 장관은 공정하고 책임있는 예술 지원체계 구축에도 힘을 실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예술생태계의 자생력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예술 창작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진다. 그는 지명 직후 인수위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블랙리스트는) 과거의 어떤 악몽 같은 기억"이라며 "윤석열 정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문화·예술·관광 등 관련 업계의 빠른 회복을 지원하는 것 역시 박 장관의 시급한 과제다. 박 장관은 조만간 관련 간담회 등을 통해 업계의 목소리를 들을 것으로 보인다.4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동해온 박보균 장관은 지난달 10일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박 장관은 서울 출생으로, 경동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정치부장과 편집국장, 편집인을 거쳐 중앙일보 부사장을 지냈다. 중앙일보 대기자 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1990년과 1995년에 한국기자상, 1991년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2011년부터 2년간 18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을 지냈다.미국 워싱턴 DC 인근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외교적 의미를 발굴, 2012년 우리 정부가 건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공로로 201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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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문체부 장관 후보 "블랙리스트, 尹정부선 존재할 수 없어"윤석열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박보균 전 중앙일보 편집인이 10일 내정됐다.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이날 서울 통의동 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박보균 문체부 장관 후보자를 발표하며 "4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열정을 쏟은 분"이라고 말했다.윤 당선인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언론과의 소통이 원만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 문화·체육·관광의 발전과 아울러 K컬처 산업에 대한 규제 해소와 문화수출산업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이날 자리에 함께한 박보균 내정자는 기자의 질의 응답에서 나온 과거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 "블랙리스트는 악몽같은 기억뿐"이라며 "윤석열 정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또 윤 당선인의 언론 정책 기조에 대해선 "언론인들이 자유와 책임이 조화를 이루면서 어느 때는 어울리고 충돌하는 그런 개념을 잘 엮어야 한다"면서 "현장에 있는 여러분들이 프로정신을 갖춰야 되면서도 또한 언론의 책임 의식을 가슴에 담아야 하는, 그런 요소를 잘 배합하고 조화롭게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이날 문체부도 박 후보자의 내정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는 "언론에 오래 몸담고 계셨지만, 문화·역사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많은 것 같다"며 "문체부 내부에서 환영하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K-컬처의 지속적 발전과 저작권 보호나 규제 해소 등 당면 과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 같다"며 "청문회 준비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한편 정통 언론인 출신이 문체부 장관에 기용되는 것은 이번이 여섯번째다. 박 후보자는 초대 이어령 장관(1989~1991년), 이수정 장관(1991~1993년), 주돈식 장관(1994~1995년), 송태호 장관(1997~1998년), 정동채(2004~2006년)에 이어 내정됐다.서울 출생인 박 후보자는 경동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40년 가까이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중앙일보 정치부장과 편집국장, 편집인을 거쳐 중앙일보 부사장을 지냈으며, 중앙일보 대기자 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윤 당선인의 대선 후보 시절 중앙선대위와 선대본부에서 후보 특별고문을 지냈다. 현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특별고문을 맡고 있다.▲1954년 서울 ▲경동고등학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중앙일보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편집국장 ▲중앙일보 편집인 ▲중앙일보 대기자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 ▲중앙일보 부사장 ▲윤석열 캠프 특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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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언론인 박보균 내정윤석열 정부 초대 내각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언론인 출신 박보균 특별고문이 내정되었다. 박 내정자는 1981년부터 40년 가까이 언론인의 길을 걸었으며 중앙일보 편집국장과 편집인을 거쳐 중앙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이후에도 중앙일보 대기자 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선 후보 시절 중앙선대위와 선대본부에서 후보특별고문을 지냈으며, 현재 윤 당선인의 특별고문을 맡았다. 한편 인선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에서는 마지막 답변자로 답변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무인 전통문화나 체육관계, 관광, 'K-컬처'에 대한 질문은 없고 불랙리스트와 언론노조의 좌편행성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답변에서 박 내정자는 불랙리스트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억몽’이라고 했다. 좌편향 언론노조 등에 대해서는 "자유와 책임의 조화, 프로성신으로 잘 배합하고 조화롭게 이끌어 가겠다.”라고 밝혔다. 박 내정자는 전통문화와 근대사에 관심을 보인 칼럼을 써 왔다. 출생 1954(68)년 1월 24일, 서울 학력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력 2014.12.~ 중앙일보 대기자 수상 2011. 제14회 효령상 언론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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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쪽 '동북공정 백서', e-북은 무료, 책은 정가 100원!책 표지와 판권만 읽어도 뭉쿨함을 주는 책이다. 그래서 놀라운 책이고, 특별한 책이다. 표지와 판권을 살펴보기로 하자. 표지에는 표제, 함께 쓴 이들, 발행주체, 발간년도가 들어있다. 표제는 ‘한중수교 30년, 역사침탈 20년 동북공정 백서’이다. 그리고 부제로 ‘역사침탈(동북공정) 대응 총서①’이라고 했다. 이 표제에 밝힌 거듭되는 메시지에서 이 책을 오직 사명감으로 발간하게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모두 20, 30년이라는 꺽는 해가 겹치는 때를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벼른 마음도 읽힌다. 한마디로 동북공정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대하는 우리 스스로의 자세를 통탄한 것이다. 이 책을 함께 쓴 이들은 서길수 우실하 박승범 박찬규 한규철 박선영 6인이다. 서길수 이사장은 그 유명한 ‘고구려연구회’ 창립자이다. 현재 ‘고구리 고리연구소’ 이사장이다. ‘고구려 본디 이름 고구리(高句麗)’ 외 20여종의 연구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우실하교수는 한국항공대 교수로, 중국 요녕대학 교수와 중국 적봉대학 방문교수를 엮임했다. ‘고조선 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와 10여 종의 저술과 50여편의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박승범 연구원은 ‘고구리 고리 연구소’ 연구원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의 고구려 유민 연구 검토’를 발표했다. 한규철 교수는 17대 국사편찬위원으로 ‘발해의 대외관계’를 저술했다. 박선영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 교과용 도서 검정위원으로 ‘글로컬 만주’ 등을 저술했다. 모두 표제를 충족시키는 전공자들이 함께 했음을 알려 준다. 발행 주체는 ‘고구리·고리연구소(高句麗 高麗硏究所)’다. 그 간의 국정교과서만의 학습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은 용어다. 이 연구소는 속표지의 설명에 따르면 1994년 설립되어 1995년 고구리연구회로 법인화한 단체다. 2008년 발해학회와 합쳐 고구려발해학회가 되었고, 1994년 설립 정신을 이어받아 활동하는 민간학술단체다. 고구리(高句麗, BC37~AD412). 고리(高麗, 413~668) 역사를 비롯하여 그 바탕인. (고)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리·고리를 이은 발해의 역사를 연구 보급하고 있다 28년의 역사를 이어온 학술 연구단체이다. *만일 아직 ‘고구리’라고 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 모른다면 ‘유튜부 서길수 동북공정’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발간 년도는 판권에서 "1판 1쇄 펴낸날: 2022년 3월 1일”로 밝혔다. 뜻 깊은 날에 ‘우리역사 되찾기 3.1선언식’을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판권란을 보기로 하자. 먼저 가격이다. 단돈 100원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했다. "책값 100원은 고구리·고리연구소에서 부담 합니다”로 하였다. 여기다 ‘e-book’은 아예 무료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렇게 제공하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문구가 있다. "이 책의 저작권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일부 또는 전부를 옮겨 쓸 수 있습니다. 출처를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e-book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널리 나누어 주세요. 중공의 역사침탈을 모두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염가 봉사도 아니고, 친절도 아니다. 우리에 대한 호소이다. "부디 이 책을 읽고 역사광복에 함께 나서주세요”라고 한 것이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지 않는가! 표지와 판권만으로도 이렇게 호소력 깊은 책이 또 있었던가? 소중한 책 '동북공정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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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코트’ 대표, ‘시간의 마음’을 읽고 ‘땅의 지문’을 지키는 문화 독립 전사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진입하는 초입 왼편에 복합 문화공간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정작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자도 서울 시내를 거의 꿰듯이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이 공간은 생소했다. 60년 묵은 5층 건물 해봉빌딩을 ‘ㄱ’ 자 모양의 본관과 별관이 병풍처럼 두른 형상이다. 500평 부지에 건물 연면적 1000평의 규모이다. 이 공간 안에 카페, 전시실, 창작 랩, 서재, 커피숍, 숙박시설, 와인바 등이 들어있다. 다음달에는 음식점도 들어선다. 아티스트들과 창작인 수십 명이 이 공간을 쓰고 있다. 공간의 이름은 ‘코트'(KOTE)이다. ‘꽃’과 ‘뜰’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다. 멀쩡해 보이는 이 공간은 겉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전투를 겪고 있다. 서울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에 따라 이미 뜯겨나간 피맛골에 이어 철거 위기를 맞고 있는 까닭이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땅의 지문’에 맞게 문화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코트’ 대표 안주영(1968~ )씨를 만나 현황과 포부를 들어봤다. 안 대표는 남다른 세계관을 가진 문화 전사이다. 2022년 3월 19일 오전 10시 인사동 ‘코트 랩’에서. Q.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얼 시도하시는 건가요? A. "‘공정 무역’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Q. 공정 무역? A."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구현하게끔 도우려는 거지요. 아티스트들이 돈 걱정 않고 창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들에게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려는 겁니다.” 인터뷰 현장인 ‘코트 랩’은 본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아티스트마다 넓찍한 책상 두 개가 있는 공간을 사용한다. 자기 사무실을 가질 여력이 안 되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안성맞춤일 것 같다. 임대료는 월 30만 원으로 싼 편이다. Q.어떤 아티스트들이 입주해 있나요? A."다양합니다. 사진작가, 현대 무용가, 패브릭 디자이너, 연극영화 연출가, 광고 기획자, 잡지 편집자, 다큐멘터리스트, 작곡가, 메타버스 개발자, 셰프 등이에요. 모두가 사막에서 샘을 찾듯이 오신 분들이죠.” 2백 평 넓이의 ‘코트 랩’에는 여러 분야의 창작인들이 열정을 쏟아 작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가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받기도 한다. Q.가난한 창작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요. 이런 생각을 그전부터 가졌던 건가요? A."제가 2013년에 ‘명동성당 지하 신자 공간 만들기 1898’ 운동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명동성당을 1898년 축성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주안점을 둔 프로젝트였죠. 화장품과 중국인의 공간이 되어버린 명동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도심 재생 운동과 지향점을 맞췄어요. 2014년에 완공됐는데, 천 평의 지하 공간에는 신자 지원시설을 집중 배치했어요. 지하의 중앙에 광장을 두고 사방으로 꽃집, 서점, 화랑, 커피숍,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전시장, 간이 공연장, 수도원 물품 직판장 등을 마련했죠.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저는 이런 인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공간은 마땅히 사용자가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북 안동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한글판 ‘타임 연구’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영어 통역사, 사모 펀드, 투자자문, 자산운용, 뉴욕호텔 인수 프로젝트, 도심 재생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등의 업무를 거쳤다.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그나마 지금의 일과 관련성이 있을 뿐, 그전의 일들은 지금 작업과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인다. Q.어떤 계기로 이 공간과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A."제가 명동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에 이곳을 방문했다가 골목 안쪽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보았는데 그 오동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야기 즉슨 이랬다. 그녀는 2016년 ‘승동교회와 피맛골이 교차하는 지점’인 이곳 뒷마당에서 늙은 오동나무를 발견하고선 부둥켜안고 울었다. 유서 깊은 두 문화공간 가운데서 백여 년을 버텨온 나무였다. 그녀는 오동이 "건물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라고 느꼈다. 피맛골 자리는 깡그리 헐리고 있었고, ‘코트’ 구역도 개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 가운데 선 오동은 머리 부분이 이미 잘려나간 채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주영 씨는 나무의 영혼을 감지하며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나?’ 안타까워했다. ‘예전 자기 집 마당에 서 있던 오동이 생각이 나서였다’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건 여간 섬세한 감성이 아니다. 일반이 표현하기는 어려운 감정선이다. 필자는 그녀가 오동에게서 ‘시간의 마음’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오규원 시인의 언급처럼 "시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있는” 까닭이다. 이 오동과의 첫 대면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서 그녀는 결심했다. ‘이 오동나무를 살려야겠다’ Q.계기치고는 대단히 특별하군요. 그 정도면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A."확실히 그렇습니다. 다들 ‘죽었다’며 베려 하는데 저만 살려야겠다고 달려들었으니까요. ‘미친 여자’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오동을 개발과 보존의 경계에 선 존재로 여기죠. 그야말로 ‘경계에 핀 꽃’인 거죠. 살릴 결심을 한 뒤 이 주변을 공부를 해보니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삼일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호해여관과 1920년대 최초로 연극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활동사진을 틀었던 조선극장이 바로 이 터에 있었더군요. 이웃에는 학생들이 삼일 만세운동을 도모했던 승동교회와 탑골공원이 있고요.” 오동나무와 조우하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그녀는 ‘공간을 통한 나눔’의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 이 공간이 예사 터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에 맞섰다. ‘땅의 지문’을 읽은 것이다. 오랜 시간 이 터에 뿌리내려 깊이 박힌 ‘땅의 지문’을 이어가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남다르고 당찬 모습이다. 그녀의 우직함을 읽게 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조선극장 터를 표시한 표지석이 다른 지번에 세워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자료를 제시하며 정정할 것을 요청해 공무원을 당황하게 만든 해프닝이다. 안 대표는 ‘코트’ 터에 조선극장의 문화 지문을 잇기 위해서는 오동부터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지붕을 뚫고 서 있던 오동나무를 보던 날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잘릴 위기에 처한 오동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기를 들어야 했다. 오동나무를 지켜 중정을 만드는 방안으로 공간 재배치에 나섰다.오동 주변의 작은 건물들을 허물고 주 건물 3개 동은 남겨 리모델링을 거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2021년불법철거로 일부가 부서진 별관은, ‘코트’ 사태를 자신의 일처럼 함께 견디어 준 코트 커뮤니티와 예술가들 덕분에 지킬 수 있었고 보수공사를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온몸으로 막아 부서진 돌 틈에서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 ‘코트’ 사태를 다룬 전시의 한 제목처럼, ‘깨어진 틈 사이로 피는 꽃’이 구현되고 있다. Q. 이제 오동나무를 베려 들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이 나무로 ‘코트’의 상징으로 삼으실 건가요? A."네. 이제는 살았어요.(웃음) 별관 뒤편 오동이 자리 잡은 마당을 유럽식 중정(中庭) 모양의 공간으로 살리려고 해요. 그러면 이태리나 스페인의 도시들을 걷다가 골목 속에서 반갑게 만나게 되는 중정이 인사동에도 들어서게 되는 거죠. 휴식과 소통, 축제의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벌써 그럴 가능성을 보였어요. 2021년 6월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프렌치 커뮤니티들이 이 중정 공간에서 프랑스의 음악축제를 열어 즐겼고, 10월에는 벨기에 대사관이 주관하는 벨기에 페스티벌이 열렸어요. 지난 3월 18일에는 매 학기마다 나라를 옮겨가며 유목민처럼 수업하는 미국 미네르바(Minerva) 대학 학생들이 이번 학기를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축제를 즐겼죠. 모두가 서울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찾아낸 겁니다. 저는 이 공간으로 끌리듯 들어선 모든 이들을 "이 공간이 초대한 사람”이라고 여겨요.(웃음) 그 사람들한테서 정말 동지애 같은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안 대표의 유일한 난제는 동업자와의 관계이다.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 펜스’에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한다. 안 대표가 ‘달’을 꿈꾼다면, 동업자는 ‘6펜스’를 쫓는다. 철학이 다르다 보니 동업자는 공격적이다. 개발지상주의자답게 처음에는 오동을 베어버리려 한 데 이어 호시탐탐 별관을 철거하려 하고,주차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다. ‘땡처리’ 업체들을 유치해 더 많은 임대료를 받고 싶어 한다. 개발이익을 최대화하려 함이다. 그동안 오동나무 앞 별관 건물을 파괴하려 포클레인을 동원하고, 고압수를 대포처럼 쏘고, 수시로 ‘용역’을 동원해 영업을 못 하게 막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 대표는 건물 파괴에 저항하다 물 대포를 맞아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용역’들의 갖은 횡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해 왔다. 그렇게 맞서다 보니 그녀는 갑자기 문화 지킴이이자 전사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다. 같은 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공동운명체 사이라 공존을 바라는데 쉽지 않은 탓이다. A."2016년 말 지분 20%로 참여했어요. 그러다 ‘디자인 하우스’라는 유명 잡지사를 유치해 사업이 안정되자 동업자가 저를 ‘아웃’시켜버리더군요. 그랬는데 2019년 말에 동업자가 급하게 연락을 해와서는 ‘사기를 당해 20억 적자를 지고 임대료도 6개월 연체돼 명도 당할 상황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 공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죠. 동업자가 진 적자를 10억으로 해 떠안고 지분을 50:50으로 나누고 제가 건물의 관리 운영권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권을 갖는 조건으로 다시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그뿐이었어요. 명도는 모면했지만, 동업자는 저와의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었던 거죠. 특히 본관 1층 전면 90평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제가 전차 계약을 체결한 공간인데도 막무가내입니다.” 별관에는 한때 ‘독립 뇨리점’을 입점시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와 메뉴를 앞세워 명소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더 높은 임대료를 받으려는 동업자의 훼방으로 무산됐다. 자신이 직접 임차한 해봉빌딩에 입점시키려는 시도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당시 해봉빌딩은 5층 전체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지하에는 물이 찬 상태였는데 거금을 들여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빼내고 고치면서까지 유치하고 싶어 했다. 창의적이면서 터의 지문과도 잘 맞아 무릎을 쳤던 까닭이다. 별다른 관광자원이 없는 인사동에 꽤 괜찮은 관광 콘텐츠가 하나 등장할 뻔했다. 올 3월 초에는 루이비통 트렁크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기획했다가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고민 끝에 동업자 요구를 받아들여 ‘땡처리’ 전시장 개장을 수락했다. 공격을 받으면 몸통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잘라주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그도 창작의 산실인 ‘코트 랩’을 지키기 위해 전시공간을 양보한 것이다. 공존을 원치 않는 그들의 훼방이 있을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는 안 대표에게 친구들은 큰 힘이 된다. 특히 이곳에서 축제를 가졌던 프랑스 커뮤니티와 외국인 아티스트들 그리고 소식을 접한 미네르바 대학생 수십 명이 이 공간에 머무르며 ‘코트’를 지원했다. 그들은 지금도 저항 문구를 만들고, 인터넷에 실상을 올리고, 사진전을 열어 대중에 알리고, 노숙을 하며 ‘용역’의 침입에 맞서고, 피케팅을 하며 시위에 동참한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끔 도우려는 마음들의 결집이다. 안 대표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토니 쉐이 ‘자포스Zappos’ 신발 CEO의 신념이 옳았음을 확인하곤 한다. 토니 쉐이는 라스베이거스에 창작 공간을 만들면서 "여러 예술혼들이 모이면 기적이 발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적은 창작뿐 아니라 예술 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에도 적용될 터이다. Q.‘공정 무역’ 실현을 위해서는 열정과 사명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돈 만들기, 그 셋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텐데 수익 창출 방안은 어떤 게 있는지요? A."네. 여러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들을 위한 공유공간 임대, 전시 대관, 이벤트 공연, 음악연주회, 파티, 출판기념회, 전시 오프닝과 클로징 행사, 광고나 드라마 촬영, 브랜드 팝업과 론칭 행사, 세미나와 콘퍼런스 유치, 파티 유치, 스몰웨딩 장소 제공, 마켓 유치, 이색 음식점 입점 등 문화 관련 사업들을 수익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트’의 전망은 밝아지고 있다. 여러 조짐들이 보인다. 광고회사들이 레트로 감성을 좇아 이 공간에서 CF를 촬영한 사례가 안 대표에게 예상 못한 힘을 실어주었다. 갤럭시와 아이폰 두 경쟁 휴대폰 회사가 차례로 이곳에서 촬영을 한 일은 이 공간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스포츠용품 업체가 BTS를 홍보모델로 삼아 진행한 사은 행사는 직원 실수로문제가 생겼었으나 결과적으로 BTS 팬클럽‘아미’와 인연을 맺어주고, 그들이 ‘코트랩’의 첫 번째 입주자가 되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제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이 공간에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디지털 로봇비서RPA 기반의 업무자동화기업, 스마트 로봇을 활용하는 주얼리 공작소, 편집숍들이 들어오고 있다. 안 대표는 코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예술인 연대 성격의 ‘예술 학교’ 프로그램도 모색하고 있다. ‘코트 랩’이 이들로 채워지면, 천군만마의 동지들이 생기게 될 터이다. 모두가 문화로서 문화를 지키고 살리려는 계획이다. ‘땅의 지문’을 매개로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이어 예술혼을 살리려는 안 대표의 뜻을 ‘시간의 마음’이 따뜻하게 품을 것이라 예상한다. Q.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후회가 든 적은 없었는지요? A."오동과의 인연으로 우연히 이 공간이 제게 왔어요. 평생 모은 돈을 이곳에 쏟아부었죠. 건물주가 나가라면 언제든 나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운명처럼 제게 온 이 소중한 공간을 어떻게든 이 공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려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제 마음의 소리에 따라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사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는 욕망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삼키고, 욕심이 공동체를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모르는 부류들에게 순수와 환희로 피어나는 꽃의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A."참 신기하게도 지금은 오동이 저를 지켜줘요. 지칠 때 오동나무를 안으면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저를 가만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자는 안주영 대표의 오동이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의 떡갈나무처럼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전위 예술가인 보이스는 1982년 독일 중부 카셀(Kassel) 시에 7천 점의 비석을 세우고 그 끝에 떡갈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선 하나씩 하나씩 비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떡갈나무를 심어나가 마침내 5년 후 7천 그루가 들어선 녹색공간을 만들었다. "주차 공간도 비좁은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운동가 한 사람의 통찰력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요제프 보이스가 떡갈나무로 시의 면모를 푸르게 바꾸었듯이, 안주영의 오동도 이 땅의 지문을 살리고 시간의 마음을 담는 인식 전환의 모티브로 역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탓에 빗나간 것처럼 보이는 화살들마저도 모두가 과녁을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 안 대표가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면, 웃으며 옛이야기를 할 날이 반드시 올 터이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도 앞으로 틈날 때마다 인사동 ‘코트’ 2층의 ‘내면의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뒤져보거나 ‘조선 살롱’에서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하고 싶어졌다. 꽃이 피는 터인 ‘코트’에서 영혼이 아름다운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꽃인 양 행세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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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서울 콘서트 입장권 4만5천 장 예매 첫날 매진글로벌 수퍼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서울에서 2년5개월 만에 여는 대면 콘서트 티켓이 단숨에 매진됐다.4일 대중음악계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 팬덤 '아미'를 대상으로 진행한 'BTS 퍼미션 투 댄스 온 스테이지 - 서울(PERMISSION TO DANCE ON STAGE - SEOUL)' 예매에서 티켓이 순식간에 모두 팔려나갔다. 이번 콘서트는 10일과 12, 1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다. 소속사 빅히트 뮤직 측은 회당 1만5000명씩 총 4만5000명을 신청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를 승인했다.국내에서 대면 공연으로는 2년 반 만에 열리는 이번 콘서트는 아미 멤버십 이용자만 예매할 수 있도록 했다. 소속사 빅히트뮤직이 좌석 규모를 공개하진 않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 회당 1만5,000명, 총 4만5,000명 규모로 공연 승인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티켓 판매량도 비슷한 분량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주최 측은 1인당 1회 공연에 1장만 예약할 수 있도록 했다. 예매 개시 이후 티켓 예약을 위한 접속자가 몰리면서 한때 접속 대기자 수가 3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연은 온라인 실시간 중계와 영화관 생중계로도 볼 수 있다. 이날 오전 10시에는 롯데시네마가 12일 진행하는 'BTS 퍼미션 투 댄스 온 스테이지 – 서울: 라이브 뷰잉' 극장 생중계 티켓 5000석을 추가 오픈했는데 이 역시 단숨에 매진됐다.방탄소년단은 코로나19 가운데도 국내외에서 여는 오프라인 콘서트의 티켓을 매진시키며 새삼 인기를 확인하고 있다.방탄소년단이 미국에서 콘서트를 여는 건 4개월 만이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로스앤젤레스(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4차례 공연을 열어 21만명을 끌어모았다. 이번 라스베이거스 콘서트엔 더 많은 인원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 날인 4월16일 공연은 온라인으로 라이브 스트리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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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에 대한 말’이어령선생 유해는 오늘 오전 8시 30분 발인되었다.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선생에 대해서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학다식하고, 달변가였다. 20대부터 60년 동안 130여종의 책을 냈다. 교사·교수, 문예지 발행인, 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선생은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언론이 선거 기간임에도 대대적으로 추모 기사를 쓰고 있다. 이 추모사들에는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생전을 기억하고자 한다. #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이인화 문학평론가) #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화가 이우환) # "세상에 대한 훌륭한 카피라이터였다. 이어령 선생은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한마디로 딱 찍어서 알려주고 시각을 열어줬던 분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문화인이었다.(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 "장관 임기 마지막 날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처리 안건 순서를 살짝 바꿔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안을 위쪽에 올려 놓으셨다고 한다. 예술 영재들에게 실기 중심의 교육을 하는 문화부 산하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어령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5분간 한예종 설립에 대해서 역설한 뒤 설치안이 통과하면서 한예종 설립이 본격화됐다. 한예종은 이듬해인 1992년 개교했다. 이어령 장관이 없었으면 오늘날 손열음·김선욱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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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가치, 대전환의 미래를 열다"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으로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체육위원회는 ‘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을 통한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스포츠 ICT 전문인력 양성 기반 구축, 정부 주도 스포츠 융복합 ICT 분야별 인재 양성 사업 확대, 지속가능한 스포츠 ICT 생태계 구축, 스포츠 ICT 현장 적용을 통한 스포츠산업 활성화 등 정책과제를 제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체육위원회(임오경‧이강래‧조재기 공동위원장)가 5일 스포츠의 가치를 담아 대전환의 미래를 열기 위한 첫 번째 체육 정책과제로 ‘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으로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 비전을 발표했다. 체육위원회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스포츠 ICT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발표한 ‘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으로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 정책과제에는 4차 산업 혁명 시대 대한민국 스포츠 분야 과학 기술의 현주소를 평가하고, 향후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체육위원회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스포츠 ICT 전문인력 양성 기반과 지속가능 한 스포츠 ICT 생태계 구축을 핵심으로, 세부적으로는 스포츠 디지털 대전환으로 미래 산업을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4대 전략을 제시했다. 4대 전략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할 스포츠 ICT 전문인력 양성기반 구축(전문가 12만 명 양성), 정부 주도 스포츠 융복합 ICT 분야별(AI, 빅데이터, 5G, IoT 등) 인재 양성 사업 확대, 지속가능한 스포츠 ICT 생태계 구축, 스포츠 ICT 현장 적용(가상현 실[VR] 스포츠실 확대, 스마트경기장, 스포츠빅데이터 활용 등) 지원 등이다. 체육위원회 공동위원장인 임오경 국회의원(경기 광명갑)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인공지능 기술과 VR과 AR,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상분석 기술까지, 스포츠 환경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고 있다”며 "디지털 대전환 시대, 스포츠 환경도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각 전략의 실현 방안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고 덧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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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주목되는 ‘국악공연 베스트 3’금년의 ‘국악계 10대 뉴스 선정’, 발표도 아쉬움과 허전함을 남겼다. 유사한 꼭지가 있어 부득이 순위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 그리고 소위 ‘국가적’ 또는 ‘사건적’ 활동이나 현상이 아니어서 제외된 것들이다. 이 중에서도 ‘고유의 국악 활동’을 지표화 하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아쉬움이다. 그래서 금년에는 ‘주목되는 국악공연 베스트 3’라는 카테로리를 설정했다. 관객의 호응이나 홍보 효과를 얻지 못하였어도 의미가 있어 기록화 하여 사례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다. 현상적인 안목에서 2000년대에는 기악 중심의 앙상블이 대세였고, 2010년대는 소리꾼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후자의 경우 전통 소리꾼을 프런트 보컬로 한 그룹 활동과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낸 현상이다. 이어 2020년대는 ‘국악이 다른 예술장르에 변화를 주는 시대’로 맞게 될 듯하다. 이는 국악계 흐름에서 확인이 되는데, 국악CD를 콘텐츠화 한 ‘정창관의 세상의 국악CD’ 싸이트를 분석한 김중현 중대 겸임교수의 분석이다. 국악의 산업화 또는 국악계의 빈익부 부익빈 현상으로도 말해지만만 일단은 긍정적이다. 이런 2000년대 초입의 긍적적인 현상이지만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고유의 국악공연 활동’ 부문이다. 다소 표현이 부적절 할 수도 있지만 ‘고유’에 방점을 둔 것인데, 말하자면 지극히 기본적이고 보편적이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본연의 활동을 말 한다. 즉, ‘보존회 정체성을 유지하는 공연’, ‘전승/전수를 위한 공연’, 그리고 ‘사회적 국악 교육을 위한 공연’ 분야이다. 이를 대상으로 세 꼭지를 선정했다. 이름하여 ‘기자가 뽑은 2021 의미있는 공연 베스트 3’이다. 이 분야는 기자가 직접 참여 또는 참관한 공연을 대상으로 하였다. 순위가 아닌 세 공연을 주목한 것이다.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 4인 공개공연’ 이 공연은 2021년 11월 10일 정선아리랑센터에서 (사)정선아리랑보존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이 단체는 1970년 전남 광주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수상자들이 중심이 되어 1971년 결성하여 창립 50년을 넘겨 뿌리가 깊은 보존회이다.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 유영란·김남기·김형조·김길자 4인을 중심으로 전수교육조교 5명, 이수자 13명, 전수장학생 6명, 전체 회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가 11월 10일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 공개공연’을 하였다. 한 무대에서 4분의 보유자가 각각의 제자들과 함께 전승 종목 긴아라리·엮음아라리·잦은아라리를 선보였다. 보편적으로 불리는 50수를 보유자 분이 연창하고 제자들이 받았다. 대개의 경우 같은 종목의 보유자들은 제자들과 각각의 공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공연은 네 분이 제자들과 함께 한 무대에 선 것이다. 이를 통해 4명 보유자 각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제자들의 성향과 가능성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보유자 활동 51년이란 가장 긴 유영란 보유자와 지난 동계올림픽 개막공연에서 ‘아라리’를 세계에 알린 김남기 보유자, 그리고 부친 김병하에 이어 대를 이은 김길자 보유자가 한 자리에 선 것은 유래가 드문 공연이다. 분명히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 지정 50년 기념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 공개공연’은 정선아리랑보존회라는 정체성을 오롯이 보여주는 공연으로, 다른 보존회에 전범을 제시했다고 본다. 도지사도, 도 문화재위원장도, 군수도, 문화원장도, 재단 이사장도 없는 기념공연이었지만, 보존회만이 보여준 최고의 의미있는 공연이었다. 지난 4월 임기를 맡은 김길자 이사장은 "정선아리랑의 진가를 전국의 귀명창들에게 전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네 명의 보유자들로 구성된 무대이다. 앞으로 여건을 마련하여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고 밝혔다. 앞으로의 기대가 크다. 동초의 길을 잇닿다, 심청가 전승공개 발표회 전북 무형문화재 제2호 동초제 심청가 보유자 장문희 명창 전승 공개 발표회다. 11월 28일 우진문화공간에서 5시간에 걸쳐 보유자 장문희 명창과 함께 7인의 제자가 전 바탕을 연창했다. 장문희 명창은 이미 전주소리축제 등의 초청으로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다수 완창한 바 있다. 김연수 법제인 동초제는 1930년대 초 여러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 중 좋은 점만 골라 창시한 유파이다. 오랜 창극 활동과 독자적인 창작기법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의 막내 계보인 장문희는 천성의 목구성으로 힘이 좋아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 번 발표회는 20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자와 함께하는 완창 발표이다. 첫 무대 ‘심청의 탄생’과 마지막 ‘재회’ 대목은 장문희 명창이 맡았다, ‘곽씨부인 죽음’은 왕시연이, ‘심청의 성장’을 모세진이, ‘개천에 빠진 심봉사’를 박성희가 받았다. 이어서 ‘행선 전야’는 서정민, ‘인당수에 빠진 심청’은 조혜진이, ‘모녀 상봉’ 대목은 김유정이 맡는다. ‘심봉사의 탄식’은 전수장학생 박수현이, 마지막 ‘후일담’은 보유자와 장학생 그리고 7인의 제자들이 함께하였다.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한 정확한 사설에 정교한 너름새와 다양한 부침새로 하여 가사 전달이 분명한 동초제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의 ‘공지적 생략’이 있어 1인 완창보다 20여분 시간이 단축되었으나 판소리의 눈대목소리 같은 박진감이 있었다. 동시에 진정성과 소리꾼으로서의 치열함이 확인 되어 완창무대의 완결성도 확인되었다. 이 전승 공개 발표회의 특징은 스승 장문희의 법제와 그 특징을 객관화하고, 이를 전수, 전승하는 제자 7인의 수용 태도와 성취도를 확인하는 특별함이다. 이는 함께하는 관객에게도 의무적인 유파 발표회라는 지루한 발표회가 아니라 각 제자들의 특장을 토막소리화 하여 박진감 있는 공연이 되게 하였다. 이 발표회는 판소리 보유자 정기 발표회는 물론 다른 종목의 발표회에도 참고할 사례가 될 것이다. 도창 역할은 한 장문희 명창은 "도전이 있어야 성과가 있고, 그래야 후학들에게 ‘잘 했다’라는 선물을 줄 수 있기에 발표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루함 없이 보고, 듣고 함께한 5시간여의 ‘동초의 길을 잇닿다, 심청가 전승공개 발표회’였다. ‘노인요양시설 전통예술프로그램 수행’ 의미있는 국악 활동으로 ‘봉사공연’이란 분야가 있다. 일반적인 공연은 아니나 노인요양 시설 같은 소외 지대에 국악 교육과 체험과 공연성을 갖는 특별한 활동을 말 한다. 이는 노인 대상 국악교육과 국악 공연이 결합된 형태로 전문성을 요한다. 이런 활동을 수향해 온 단체가 세종시 소재 국악교육 단체 ‘한누리국악원’이다. 이 단체의 황정수 대표는 국악교육을 전공했다. 진주교대 국악교육학과 대학원에서 국악교육전공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논문은‘전통놀이 화가투를 활용한 초등 국악기 이해력 향상 프로그램 개발’이다. 초기 감수성이 형성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국악을 밀착시켜 주기 위해 ‘화가투(花歌鬪)놀이’를 활용한 연구이다. 또한 실기로 민요를 택해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4호 평북농요를 이수하기도 했다. 이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국악아, 노올자!’ 기획하고, 지역문화 향유 활동사업 ‘아리랑 한마당’, 아트체인지업 ‘국악으로 즐기는 태교자장가’ 같은 교육 프로그램 등의 기획자이다. 이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는 국악인 역시 국악인 들이다. 방문배는 판소리 , 이은지는 가야금병창, 김성부는 타악, 윤명숙은 민요를 전공했다. 한누리국악원이 행한 주목하는 국악 봉사공연은 ‘노인요양시설 전통예술프로그램 수행’이다. 9월 15일부터 12월 까지 프록램을 수행 한 곳은 ‘공주 원로원’, ‘세종 VIP요양원’, ‘대전 유앤아이’, 대전요양원 네 곳이다. 공연 회수는 30회로 수혜 노인 수는 980여명이다. 각 회는 ‘도입-전개-정리’ 단계로 구분하여 교육과 놀이와 공연형 프로그램이이다. ‘프로그램 수행계획서’에 의하면 ‘악기체험⟶악기 연주⟶병창’, ‘민요공연⟶노래 부르기⟶개사하기’ 같은 순차적 활동으로 이해와 놀이와 공연 성격을 부여했다. 무용으로 ‘꽃춤’, 복놀이로 ‘복주머니를 이용한 퀴즈놀이’, 노래 수업으로 ‘지역별 아리랑 알기’와 ‘아리랑 사설풀이’ 등이 있다. 춘향가의 경우, ‘가야금 병창 춘향가’와 ‘판소리 춘향가’로 구분하여 이해를 도왔다. 황정수 대표는 "국가 지원을 받아 수행한 국악 프로그램이지만 어떤 공연 무대보다 준비와 성의를 다한 활동이었습니다. 국악교육 전공으로 태교음악과 초등교육 프로그램을 공부한 것이 노인 봉사공연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앞으로도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더 즐기는 프로그램 개발에 노력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리랑 화가투’ 관련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국악의 기능과 국악교육을 생각하게 해준 의미있는 봉사공연을 4개월간 수행한 한누리국악원 활동은 보상이 주어질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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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국악신문 대표이사 이취임식주식회사 국악신문 대표이사 이취임식이 9일 정오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주요 필진과 자문위원단과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간략하게 개최된 이날 이취임식에서 주간 지면 신문과 인터넷 신문의 이원화와 주식회사로의 전환에 따라 구조 조정을 하였다. 이에 의해 객원기자로 함께 하던 기미양 기자가 대표이사로, 김지연 전 대표가 상임이사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김지연 전 대표는 이임사에서 "30년 국악신문 역사를 빛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고 있는 봉사단체의 중책을 맡게 되어 부득이 자리를 옮기고자 합니다. 저는 측면에서 돕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기미양 대표이사는 취임사에서 "전통문화예술 전문 언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하였고, 기업화를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했다”라고 밝혔다. 본지에 ‘춤새’를 연재하는 이무성 화백은 신년 세화歲畵를 연재 필자들에게 선물하였고, ‘흙의 소리’를 집필하는 이동희 작가는 "국악계의 활로를 모색하는 기사들과 전통문화 전반을 다루는 국악신문은 독자성을 갖는 언론으로 확장하리라는 기대를 갖게한다”고 격려했다. 이날 참석자는 연재 필자 이동희, 이무성, 이종선, 정창관, 박상진 교수가, 자문단에는 정문교, 정승만, 신동립 3인, 대기자 이동식, 안상윤, 김연갑과 편집부 김동국, 정현조, 김한나 기자가 함께했다. 한편 이날 막내 김한나 기자의 깔금한 진행이 돋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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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래를 붓으로 부르다’ 한얼 이종선 書藝展"한글은 상형성象形性에 취약하기 때문에 독자미獨自美의 표출이 어렵다. 당연히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의 조화기 필요하다. 글자와 행과 여백의 소통을 통해 전체를 하나로 이끄는 것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글자의 가독성可讀性을 확보하며, 글감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조형과 획에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구체화시킨다.” 우리나라 한글 서예계의 중진인 한얼 이종선의 대표 작품 ‘훈민정음 서문’의 자평 일부이다. 한글서예의 특징과 속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대목이다. ‘한글서예’의 성립 자체가 한글이 전용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만큼 작가적인 운용 여지가 많은 분야이다. 이 분야의 주역 중 일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던가. 2년 남짓한 연재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64편에는 작가만의 작품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주요 서체인 궁체, 민체, 고체와 한문 행초서체와 예서, 호태왕비체의 필의筆意를 더해 자, 행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질량분활법을 잘 드러냈다. 이는 한글에 한자가 섞인 우리 노래 시조·가곡·잡가의 다양한 변격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직하고 질박한 우리 노래의 속성을 고저장단은 물론 시김새 까지도 표현한 듯하니, 이동식 대기자가 표현했듯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준~”(본지 11월 28일자) 것이다. 국악신문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이 선별, 전시하게 되었다.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일주일간 열린다. 작품은 노래로 또는 율창律唱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대가 열성(列聖)에서 명공석사(名公碩士)는 물론 기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가의 명작이다. 물론 잡가 ‘처세가’ 같은 뛰어난 무명씨의 작품도 있다. 글감은 대체적으로 잘 알려진 가집인 청구영언·가곡원류·남훈태평가·해동가요·교주가곡집 소재 선정작이다. 전시작의 형태도 다양하다. 우연욕서偶然欲書로 좋은 글귀를 만나 불현듯 글씨가 쓰고 싶어 붓을 들었는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 옛 서책의 남는 종이에 쓴 잔지여묵殘紙餘墨도 있어 손바닥 크기에서 2메타 남짓한 크기도 있다. 바탕지도 다양하다. 장지는 물론, 최고급 냉금지, 다양한 문양지, 시전지, 중국산 선면 문양지까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1953년 경기도 용인 출생이다. 노장적 삶을 살고 있는 성정대로 ‘한얼’과 ‘醉月堂’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유농서회惟農書會를 주재하고 있다. 불교방송개국기념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비 등의 금석문을 남겼고,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성균관대학교, 한글학회, 김대중기념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게 늘 그 모습으로 있어 왔던 자연스러움에 나는 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이 전통에 바탕을 둔 서예 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나의 작품이 진행되는 이유이다.” 작가의 서예에 대한 서론緖論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서론書論이다. 이에 기반한 작가의 한글궁체와 흘림, 한문 전서와 예서, 국한문 혼서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귀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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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무대 변사 ‘광대 김명곤’김명곤 씨는 독일어 교사, 잡지사 기자, 연극배우, 영화배우, 극단 대표, 시나리오 작가, 성악가, 소리꾼, 국립극장장, 문화부 장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노는 ‘광대’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예인 김명곤을 관통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이다. 그 자신도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국악도 그를 형상화하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국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국악이 그의 삶과 창작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국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떤 게 있을 것인지 등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굿모닝 가곡’은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가곡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노래에 얽힌 스토리를 극과 영상자료 그리고 해설을 통해 전달했다. 특히 변사의 역할이 화제를 모았다. 변사는 특유의 목소리로 다소 코믹하게 노래에 얽힌 사연을 풀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음성 더빙이 안 되던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절, 극의 전개와 출연자의 대사를 읊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이 변사를 김명곤 씨가 맡아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든 무대 요소를 가곡 공연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이끌었다.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 측은 12월 1일부터 이틀간 세 차례 앙코르 공연을 개최한다. Q. 가곡 무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건 획기적 발상이군요. A. 네.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변사 쪼(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예요. Q 변사를 맡으시면서 참고한 모델이 있었나요? A. 옛날 연극할 때도 신파극에서 변사를 맡아 했었어요. 전설적인 변사 고설봉 선생이나 최후의 변사 신출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기법을 배우기도 했죠. 저한테는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역할입니다. Q. 변사가 해설을 해주면 관객들의 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죠. A. 맞아요. 그냥 해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언변을 구사해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효과를 내죠. 노래의 배경이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작곡 작사에 얽힌 뒷얘기를 하니까 펑펑 우는 분들도 있더군요. Q.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에게는 변사의 존재가 생소할 텐데 먹혔군요. A. 코미디언들이 과장되게 구사하던 것과 달리 저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애썼죠. 홍난파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소개하며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은 새장에 갇힌 새였다. 앵무새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코믹하게만 하지 않고 시 낭송하듯 들려주었죠. ‘동심초’ 같은 서정적인 노래는 그 시가 탄생한 중국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의 시를 들려주고 이것을 김한석이 어떻게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겼는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하니 관객이 편하게 교감을 하더군요. Q 가곡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운데서도 몇몇 대목을 변사의 해설에 이어 창을 들려주면 청중 호응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오페라로 치면 아리아들만 선곡해서 들려주는 갈라(Gala) 형식이 되는 거죠. A. 재미있을 것 같군요. 시도해봄 직합니다. 보통은 소리꾼들이 몇 마디 해설을 하고선 소리를 하는데 클래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금난새 같은 지휘자가 곡을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면서 이해를 돕듯이, 판소리도 변사가 그 해설 기능을 맡아 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은 해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Q. 가곡에 이어 판소리 변사로도 나서 보시죠.(웃음) A. 저는 할 수 있죠. 서양 음악, 우리 소리 모두 공부를 했으니까요. 모르는 분야 같으면 나서기 어렵겠지만, 동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고 또 제가 노래 부르는 걸 즐겨해서 재미나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Q. 네. 가곡과 판소리 장르의 ‘송해 선생’이 되시면 좋을 것 같군요.(웃음) 90살이 넘도록 하시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대중성도 높여주시고요. A.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웃음) Q. 국악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 2학년 때 고향 전주에서 가까운 김제에 놀러 갔다가 소리 배우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양음악에 매료돼 있었죠.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팝송 따위만 듣고 불렀는데 판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이렇게 좋은 우리 소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몰랐을까....하고요. 그때 단발머리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방송작가 김병준 씨 부인인 소리꾼 남궁정애 여사입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의 판소리 사랑이 시작된 거죠. LP판을 사서 듣기 시작한 겁니다. Q. 어떤 곡들이었나요? A. 임방울, 김현수, 박록주 명인들의 단가였어요. 알고 산 게 아니라 그 당시 인기 있던 레코드들을 사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가장 좋아했던 곡이 김현수 선생의 ‘사철가’였죠.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늙은 노래가 가슴에 와닿던지... 아마 폐병을 앓았고,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힐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런 판소리들이 인생 전반에 어떻게 투영되었나요? A.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맡긴 1993년 영화 '서편제'에 제가 그 ‘사철가’를 삽입해 불렀죠. '개벽'에는 동학 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 역을 맡아 칼춤 추며 부르는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고요.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쓰면서 소리꾼 명인들의 말과 어투를 많이 차용했죠.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 속 판이여, 이놈아!”라고 아들에게 일갈한 대사나, 연극 '격정만리'에서 격동기 연극인의 입을 통해 "황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소. 오로지 나의 소망은 조선 냄새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외다.”라고 읊조린 대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Q. 명창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A. 대학 4학년 때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전습소’라는 한자 간판을 발견하고선 무턱대고 4층으로 올라갔죠. 그 자리에 박초월 명인과 조상현 선생이 함께 계셨어요. 알고 보니 두 분이 판소리 보존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하셨더군요. 조 선생이 북을 당기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불렀는데 웃음거리가 됐죠. 판소리 곡을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으니 두 분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겠어요. 학생들도 웃고. 그렇게 입문을 했는데 그때 제1 조교가 김수연 명창이었고, 제2 조교가 김경숙 명창이었어요. 저는 박초월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타향에서 어렵게 산다는 걸 아시고선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라고 배려해주셨죠. 아침에는 밥도 갖다주시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총무 비슷하게 됐어요.(웃음) 그러다 박 선생님이 당신 아이들 가정교사를 맡기셔서 그 댁에 입주하게 되었죠. 불광동이었는데 새벽마다 불광산에 올라 목을 풀고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했죠. 그렇게 10여 년을 배웠습니다. 박 선생님 덕에 국악계의 명인들을 두루 만나는 행운도 누렸죠. 그분들 인터뷰 기사를 써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인터뷰를 묶어서 '광대의 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도 했죠. 그분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김명곤 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다. "판소리와의 인연은 마치 누가 미리 연출해놓은 것처럼 내 인생에 파고들었다.” Q.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 어떤 건가요? A. 홍보가, 수궁가를 배웠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고고천변’입니다. 거북이가 뭍으로 나와 처음 맞이한 세상 풍경을 노래하는 대목이죠. 박 선생님은 남자들에겐 민요는 안 가르치셨어요. 대체로 민요는 여자 장르의 곡으로 취급했어요. 단가인 ‘사철가’도 제가 즐기는 곡인데, 서편제를 하면서 제가 따로 배운 노래입니다. 김수철 씨가 작곡한 서편제 중 삽입곡 ‘소리길’도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제가 가사를 붙여 부르곤 합니다. 김명곤 대표는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가 우리 음악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Q.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한국음악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A. 네. 뒤돌아보면 우리 음악과 그 음악을 하는 광대를 조선조는 5백 년간 무시하고 홀대했어요. 그래서 국립극장장일 때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노무현 후보에게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국악진흥과를 신설해 독립부서로 두고 한국음악 지원에 나서기도 했죠. 이 국악진흥과는 제가 떠나면서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이나 다른 기구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합니다. 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그걸로 한류의 세계화를 도모했으니까요. 우리 전통예술 분야는 정치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요즘 국악 하는 젊은이들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걸 자주 봅니다. 소리 내는 기본이 탄탄하니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죠. 확실히 우리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죠? A. 네. 동감입니다. 일각에서는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서양도 클래식과 팝이 서로 퓨전 하며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있죠. 물론 전통도 지켜가면서요. 어느 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초석이 된다는 겁니다. 교류하고 소통하며 필요하면 통합도 가능하죠.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창법을 연구하고, 한국음악 하는 사람들도 퓨전을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음악 장르 전체가 동반 발전하는 겁니다. 경계를 두지 말고 두 음악 세계가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도록 협업을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올드보이로서 저의 남은 인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창의적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모습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대표는 내년 초 ‘예술의 전당’이 기획하는 획기적 가곡 공연 프로그램을 의논해야 한다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떤 형식일지가 궁금했다. 창의적 열정의 소유자인 그가 지휘하는 만큼 기대가 크다. ‘꽃을 밟고 지나간 말의 발굽에서 향기가 날(踏花歸路馬體香)’때 그는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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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를 맞아 서예가 이종선을 만나다시조 시인으로 알려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분천으로 내려와 어부가를 시조 형식으로 만들어 퇴계 이황과 그 형 온계 이해를 배 위로 불러서 관객으로 하고는 노래로 불렀다. 아쉽게도 그 노랫가락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노랫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고쳐 만들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고 즐겼던 시조나 가곡을 직접 들을 수 없는 현대에 이 노래들을 붓으로 들려주는 서예가가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지낸 중진 서예가 이종선(67) 씨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을 2년 이상 발표하며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종선 서예가를 이동식 국악신문 대기자가 천도교 수운회관에 있는 서실에서 만났다. Q. 전시회를 하신다고요? A. 네. 지난해부터 음악이 담긴 우리 말, 시조, 한시 등 사설을 한글로 써서 국악신문에 발표해왔는데요, 그동안의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작품을 오프라인으로 시민들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에 인사동의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에서 한 열흘 엽니다. Q.그동안 신문에 쭉 올려주시는 서예 작품들은 아주 보기에 편하고 다양하고 또 정말로 노래를 읽어서 듣는 듯한 흥취를 느낍니다. 그런 것들이 한글로 써서 그런 것이겠지요? A. 우리 조상들은 생활에서의 생각, 사상, 감회 이런 것들을 시조나 시로 만들어 발표해왔고 또 노랫말로도 전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된 이런 것은 굳이 한문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한글서예로 표현하는 게 본래의 언어의 특성과도 맞아서 편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Q.선생님은 그동안 한글서예 운동을 주도하셨지요? A. 서예의 뿌리는 한자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 추구해야 할 길이 있는데, 한자서예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서예 세계를 자칫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서예라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을 글씨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글인 한글로 쓰는 것이 맞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더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글서예는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425년에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셨지만,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다 한문을 쓰고 궁 안에서나 일상 서민들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한글이 사용되었기에 문자 조형, 곧 서예로서의 한글은 사실 근세 이후에 한글이 전용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를 확대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요. Q. 그런가요? 한글서예가 한자처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A. 그렇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한 장르로 대중에 등장한 것이 1920년대 초로, 윤백영이란 여성이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인 궁체를 처음으로 전시작품으로 출품을 했고, 그 무렵부터 여러분들이 궁체로 한글서예를 태동시켰습니다만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중 김충현 씨가 지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정자체의 한글서예, 거기다가 훈민정음 판본에서 따온 고체까지를 발표함으로써 한글서예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지요. 그 뒤 남궁억, 장지연, 이철경 등 문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넓어졌는데 다만 그것이 엄격한 틀에 갇혀 있던 편이었다가 최근 20년 이래에 한글서예도 조형미를 새롭게 추구하는 현대 서예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Q. 그런데 서예 작품들을 보면 순수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과 혼용해 쓴 경우도 있던데... A. 사실 우리가 한글날을 맞으면 꼭 나오는 것이 한글전용이라는 말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은 뜻이 명확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도 어차피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것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해야만 정신과 예술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한글로 쓰지만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써서 그 뜻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Q.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지요? 그때 문경에서 아리랑 노랫말을 모아서 한글서예로 표현한 큰일을 하셨는데.... A. 제가 한국서학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 마침 문경시가 전국의 우리 아리랑 가락과 사설을 모으자는 운동을 시작해 저희가 문경시와 MOU를 맺고 2년 동안 갖은 애를 써서 아리랑 가사들을 거의 망라해서 서예로 담아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붓으로 부른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 120여 회원들이 각기 10점에서 30점까지, 1만 수를 자신의 필체와 필법, 철학으로 썼기에 그 아리랑 서예를 통해서 노래로만 있던 아리랑이 유형의 시각예술로 태어났고요, 이 작업으로 우리나라 현대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 세계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집약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 작업을 하면서 문경에서 만들어진 전통 한지를 썼는데, 이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순수 천연재료만으로 만들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지 중에 가장 좋더라고요. 비단은 오백 년이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데, 이번에 한지장 김삼식 씨가 만든 전통 한지들로 쓴 아리랑 작품들은 정말로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문경시에서 한 아리랑 서예 작품화는 아리랑 가사와 사설을 처음 모은 것도 그렇지만,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긋는 작업이었습니다. Q.그런데 한국서학회는 외국에서도 한글 서예전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서예가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합니다. A. 저희는 이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분들이라면 한글서예도 당연히 관심이 있고 또 새로운 예술표현에 대한 탐구심도 있습니다. 전에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그런데 한자가 뜻글자인 데 비해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서예의 조형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요? A.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해서 이름이 다르고요, 사실 중국 서예인들이야 한자를 쓰는데. 일본 서예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표음문자인 가나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자신들의 글을 많이 쓰지요. 어찌 보면 한자만의 서예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조형적으로 확대 개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한자(漢字)이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Q.한자나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서예도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 같은데요? A. 서예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예술의 표현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글 자체의 인격이랄까 품격에다가 서예가의 인품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약허(若虛) 곽사(郭思)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인품을 담아 한자와 한글이 같이 쓰이면 그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 서예는 한글이 들어감으로써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최근 서예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년과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또 지역사회에서 취미 개발을 위해 각종 강좌가 많아지면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서 서예인들로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 서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어려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수양 수단이기에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서예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저희 서예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Q.‘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지요?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말인데, 이 선생님 취월당(醉月堂)이란 호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습니까? A.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젊었을 때 술을 자주 했는데, 제 스승인 능허(凌虛) 스님이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 나오듯이 술에 취하지 말고 달에 취하라는 뜻으로 호를 주셔서 감사하게 쓰고 있습니다. Q.12월 9일이지요? 그런 작업들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A. 네. 시간 되시면 인사동에 나오셔서 백악미술관을 찾아주셔서 우리 한글서예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